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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아,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휘준-

by 휘준쭌 2025. 6. 3.

아우슈비츠 아, 내가 이 굉장한 곳엘 오다니!
 

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 정문
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이 끔찍한 역사의 현장은 수도가 바르샤바로 옮겨지기 전까지, 500여 년간 폴란드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던 크라쿠프 서쪽에 붙어 있다. 2005년, 그러니까 20년 전 필자는 세계문화유산인 소금광산과 아우슈비츠를 같이 가볼 기회가 있었다. 찾아가는 길은 폴란드가 전형적인 농업국가임을 잘 보여주었다.
 
 
땅은 우리나라의 3배나 되지만 인구는 우리의 1/3 밖에 안 되는 나라, 게다가 90%가 평지인 나라, 농토에 비료를 쓰지 않고 휴식년제를 꼭 지킬 만큼 옥토가 풍부한 나라를 보았다. 이 순박하고 풍요로운 나라가 한 미치광이에 의해 짓밟힌 흔적을 보러 가는 길. 그 음울한 길 위에서도 넓은 옥토에 대한 부러움은 발끝을 떠날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 정문,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한다' 라고 쓰여 있었다
아우슈비츠 정문,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한다' 라고 쓰여 있었다.

 
폴란드는 암울했던 상처를 잊지 않기 위해 당시 포로수용소 중에 한 귀퉁이를 박물관으로 보존한 셈이다. 그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날씨는 매우 음산했고 관람객들의 표정은 서양인이나 동양인이나 노인이나 젊은이나 모두 침울하였다. 그들은 모두 아우슈비츠에 도착하기 전에 수용소의 내력을 듣고 찾아오기 때문이리라.
 
이 수용소 안에서 짐승처럼 죽어간 사람들이 150만~600만으로 추산된다고 하였다. 죽은 사람 숫자에 그렇게 차이가 큰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주장 차이인데 유태인들의 주장이 600만 명이다. 이 숫자는 당시 유럽 전체 유대인의 80%나 된다. 그러나 가해자가 주장하는 수치 150만 명만 생각하더라도 상상이 안 되는 끔찍한 숫자이다.
 
그런데 600만 명이라니. 천 명의 시체, 너무 끔찍하다. 만 명의 시체, 상상조차 안 된다. 도살장의 짐승으로도 그려낼 수 없다. 그런데 그 만 명의 시체가 수백 더미씩 사라졌다니 어찌 그릴 수 있겠는가. 사람의 머리카락만 가득 쌓여있는 유리 창고를 보았다. 머리카락만 모아놓은 무게가 7톤이란다. 그러나 그것도 극히 일부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 머리카락으로 직조한 천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니. 수북한 독가스깡통, 녹슬고 엉켜있는 수천 개의 안경테, 신발, 의수족, 머리빗, 보온병 등 그들의 생필품을 보면서 처참한 생각이 앞섰지만 같은 시기에 일제치하에 있던 우리 조상보다 훨씬 문명생활을 한 민족임도 쉽게 알 수 있었다. 벽보로 걸린 커다란 사진들 중엔 잠시 후 처형당할 사람들의 눈망울이 나를 보고 있었다.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역사
아우슈비츠 포로 수용소 역사

 
한 치 앞의 미래도 모르는 사람들이 목욕탕 앞에 줄을 지어 서있고, 목욕을 마친 그들은 가스실로 들어가 죽는지도 모르게 죽어갔다. 목욕탕 앞에 서있는 사람들 중에 죽기 위해 목욕을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리라. 우리나라에 짚신이 있던 시절에 보온병을 사용했던 문명인들이 강제노동과 굶주림, 지옥 같은 환경에 넋을 잃고 애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사진을 보다가 나는 그중 한 사람이 되어본다.
 
1944년 6월, 나비넥타이를 맨 나는 파리의 초등학생이었다. 아버지가 정치범으로 몰려 고생하던 중 잠시 여행할 곳이 있다며 온 가족이 집을 나섰다. 같이 가는 삼촌 부부는 새로 살 곳에 대한 기대에 부풀어 즐겁게 짐을 꾸렸다. 짐이라야 당장 며칠 쓸 물건과 귀중품뿐이었겠지만. 그러나 레옹역에서 기차를 탄 날 바로 우리는 좋은 곳으로 여행 가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타는 승객들은 매를 맞으며 밀려 타는 사람이 많았고, 그들은 범죄자, 집시, 동성연애자, 여호와의 증인 등이라고 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열차에 갇혀있었다. 열차는 밤낮없이 달렸고 콩나물처럼 실린 사람들은 옴짝달싹도 할 수 없어 서서 용변을 보았다.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용변 냄새와 신음소리와 암흑과 굶주림 끝에 14일 걸려 도달한 곳이 오스비에침(Oswiecim), 기차 문이 열리자 우리는 눈이 부셔 아무도 내릴 수 없었다. 채찍에 끌려 내린 사람이 3/4, 못 내린 사람들은 도중에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내린 사람들도 모두 물을 찾으며 쓰러졌다. 나도 가까스로 목을 축인 뒤에야 삼촌과 엄마가 서서 죽은 걸 알았다.
 
우리는 처음에 비르케나우 수용소에 배치되었다가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분리되었는데 비르케나우는 아우슈비츠의 20배가 넘는 크기 수용소였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쓰인 아우슈비츠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우리들 중 노인과 환자와 어린아이가 분류되었다. 아버지와 숙모는 가방과 소지품을 빼앗기고 다른 기숙사로 분리되었고 노인과 환자는 목욕탕으로 향하는 줄에 섰다. 장교 하나가 노인과 환자는 우대 차원에서 먼저 휴식을 한다고 외친 말에 마음 놓고 목욕을 마친 그들은 죽음의 가스실로 직행했다.
 
가스독살은 가장 적은 돈으로 생명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이란다. 그들은 대변과 하혈을 쏟아내며 고통 속에 서로를 물어뜯고 신음하다 20분 만에 시체로 나왔다. 노동력이 없는 사람들은 식량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살려둘 수 없다는 논리였다. 얼마나 잔혹한 시대였던가.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시체들은 반지, 금니 등을 착취당하고 머리카락을 잘린 뒤에 바로 옆방에 위치한 화장터에서 태워졌다. 머리카락은 알레르기 없는 고급 직물 직조에 쓰였다니 그곳은 가히 시체처리공장이라 불릴 만큼 생지옥이었다. 그 앞에서 장교 하나가 노동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 쪽으로 분류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코 살아있는 사람들이 운이 좋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그들은 혹독한 노동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생지옥을 걷다 죽어갔다. 나는 1945년 1월 폴란드를 점령한 소련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그때 우리 어린 친구들은 20~30명씩 수용되어 배고픔을 참고 있었지만 서넛씩 없어졌을 때는 더 큰 수용소로 갔다고만 들었다. 그곳은 배는 안 고픈 곳이라는 소리에 우리도 빨리 차출되기만 기다렸었다. 그런데 더 커다란 수용소, 배는 안 고픈 곳, 그곳은 생체 실험실이었다.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

 
실험도구로 쓰인 우리 어린 친구들이 10만이 넘는다는 얘기는 전쟁이 끝난 뒤 기록을 보고 알았다. 인산인해(人山人海)라고 했듯이 10만, 10만이라는 인파는 얼마만 한 산을 이룰 수 있을까? 사람이 만든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그곳이 지옥보다 나았을까 지옥이 나았을까.
 
2014년, 브라질월드컵을 준비하는 나는 올해 나이 80이다. 그러나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 나의 친구들은 탈무드로 길들여졌고 나의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성경을 가까이하며 살았지만 짐승보다 못하게 죽어갔다.
 
4년도 긴데 40년도 아닌 40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고, 그 후에도 오랜 세월 유랑을 하다가 기적적으로 나라를 다시 세웠지만, 현재에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민족, 우리는 과연 아직도 선민인가.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아직도 믿지 않는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을까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