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

카네이션을 건네는 손엔 사연이 있다

by 휘준쭌 2025. 5. 26.

카네이션엔 모두 사연이 있다
카네이션엔 모두 사연이 있다

 

5월이 오면 사람들 손에 꽃이 들린다.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까지.

저마다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담아 건넨다지만, 그 손마다 사연 하나쯤은 꼭 달고 있다.

카네이션은 그냥 주는 꽃이 아니다.

 

어쩌면 ‘은근슬쩍 눈물샘을 건드리는 꽃’이거나, ‘지갑 사정을 고려한 협의의 상징’ 일 수도 있다.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아내에게 카네이션 한 송이를 건넸다. 웃으며 받긴 했지만, 눈빛은 복잡했다.
“당신, 나한테 꽃 준 게 몇 년 만인지 아세요?”
“올해가 몇 년도더라…”


아내는 웃었고, 나는 얼른 주방으로 숨었다.

꽃은 한 송이였지만, 그 안엔 지난 몇 년간의 무심함과 올해의 사죄가 함께 있었다.

그러니까, 이 꽃을 건네는 내 손에는 그야말로 ‘사연’이 가득했던 것이다.

 

어버이날이 되면 자식들도 어김없이 ‘카네이션 미션’을 수행한다.

나도 젊었을 땐 부모님께 직접 꽃을 사 드렸지만, 요즘은 대부분 ‘카톡 선물’로 대체된다.

이 부분은 나의 얘기다. 나는 실물을 주기 어려우므로 카톡 선물을 이용한다.

그런데 며칠 전 손주가 내게 묻는다.
“할아버지, 왜 어버이날엔 꼭 카네이션이에요?”


잠시 머뭇거렸다.
“글쎄다. 가격이 적당해서 그런가…”
“그럼 어린이날엔 풍선이 적당해서 풍선 주는 거예요?”
이 녀석, 질문이 매섭다.

 

사실 카네이션이라는 꽃은 꽃집에서도 효도 시즌 한정으로 화려하게 등장한다.

5월을 벗어나면 그새 시들거나, ‘전시용’ 구석으로 밀려난다. 어느 날 꽃집 아주머니께 물었다.
“왜 카네이션은 항상 5월에만 잘 나갈까요?”
“그야 5월 지나면 아무도 안 사니까요. 장미는 사랑이고, 해바라기는 희망이지만,

카네이션은 효도예요. 효도는 기한이 짧거든요.”
웃으며 던진 말이지만, 어쩐지 묘하게 와닿았다.

 

스승의 날도 마찬가지다. 정년 퇴임 후 나는 재능기부차원에서 교단에 1년쯤 섰었다.

그땐 손 편지 한 장, 붉은 카네이션 하나만 받아도 가슴이 뜨거워졌었다.

요즘은 ‘금지된 감사’라며 꽃도, 선물도, 편지도 사라지고 있다.

 

그러던 중 올해 스승의 날, 10년 전 제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선생님, 덕분에 아직도 사람 구실 하며 삽니다. 직접 뵙고 싶지만,

혹시 부담되실까 봐 문자로만 감사 인사 드려요. 건강하세요.”
이런 문자 하나에도 눈물이 핑 돈다.

 

내 수업을 졸고 듣던 그 녀석이, 이젠 사람 구실 한다니. 감격이다.

그날 오후, 문득 나도 생각났다.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선배님.

신앙이란 게 하루아침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니,

내 부족한 질문을 차근차근 받아주시던 그분이 없었다면 나는 아직도

아담이 흙으로 빚어 만들어진 사람으로 알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용기 내어 카카오톡으로 선물 하나를 보냈다. 케이크와 커피세트. 문구는 이렇게 적었다.
“늘 좋은 말씀과 따뜻한 기도로 힘이 됩니다. 건강한 하루하루 보내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리고 보내놓고, 좀 창피하기도 해서 휴대폰을 뒤집어놓았다.

 

그런데 몇 분 뒤 도착한 답장은 이랬다.

“선생님의 말씀에 제가 더 큰 위로를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엔 커피 말고, 차 한 잔 함께 하시지요.”


그 순간, 스승과 제자의 자리가 바뀌었지만 마음은 나란히 있었다.

이쯤 되면 확신한다. 카네이션을 건네는 손엔 다들 이야기가 있다.

어떤 손은 미안함을, 어떤 손은 감사함을, 어떤 손은 사춘기 이후 처음 쓰는 진심을 조심스럽게 담는다.

그리고 그것이 꽃이라는 포장을 입고 세상에 나올 뿐이다.

 

우리는 살아가며 누군가에게 빚을 진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마음의 빚이다.

카네이션은 그 빚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꽃이다.

그래서 어쩌면 5월은 ‘꽃의 계절’이 아니라, ‘마음의 빚 고백의 계절’ 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5월이 가기 전에, 누군가에게 카네이션을 건네야 할 마음이 있다면,

사연을 담아 건네시길. 값은 작아도 마음은 진하게 전해진다.

 

아, 그리고 혹시 나처럼 눈치 없이 한 송이만 건넸다면…

함께 식사라도 하자며 은근슬쩍 덧붙여 보시길. 그게 바로, 진짜 카네이션 플렉스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