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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을 관통하다 : 성판악에서 관음사까지 -휘준- 한라산을 관통하다 – 성판악에서 관음사까지, 하루의 기록제주시 관덕정 앞. 아침 5시 30분. 아직 도심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고, 하늘은 희끄무레하다. 낮은 기침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배낭 소리 사이로, 오늘의 결심이 또렷이 일어난다.나는 한라산을 관통해 오르기로 했다. 성판악에서 정상인 백록담을 지나, 관음사로 내려가는 한라산 종주 코스. 길이는 약 19.2km, 산행 시간은 9시간쯤, 그야말로 한라산을 직선으로 가르는 하루다. 관덕정 맞은편 정류장에서 버스 다니기 전 시간임을 확인하고 택시를 탔다. 차창 밖으로는 서서히 붉어지는 새벽빛이 번진다.제주시청 정류장에서 281번 버스 첫차(5:45)를 탔다. 성판악 입구 정류장 직전에 버스 하차 벨을 눌러야 서는데 그러지 못해 3정류장을 지나쳤다. 제주 도로.. 2025. 7. 22.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길 -휘준- 올여름은 어딘가로 가고 싶으면서도, 그 어딘가가 너무 멀지 않았으면 좋겠고, 또 너무 유명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사진은 예쁘게 나왔으면 좋겠고, 그러면서도 덜 더웠으면 좋겠다는 욕심 많은 마음이 슬그머니 올라왔다.욕심은 욕심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나는 그런 바람이 모여 만든 장소를 알고 있다. 전남 담양, 바람의 통로라 불릴 만한 그곳. 이름만 들어도 초록빛이 솟아오르는 그곳, 죽녹원과 메타세쿼이아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처음에 대나무숲이 무슨 재미일까 싶었다. 나무는 나무고, 그늘은 그늘이지, 대나무가 만든 그늘이라고 특별할 게 있을까? 그런데 막상 발을 들이고 나니, 이건 그냥 ‘그늘’이 아니었다.죽녹원의 바람은 바람 자체로 살아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지나가는 게 아니라,.. 2025. 7. 21.
낙엽을 태우면서 / 이효석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덧 날고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의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30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건만, 날마다의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 ― 제일 귀찮은 것이 벽의 담쟁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굴뚝의 붉은빛만 남기고 집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 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쯤에는 벌써 다시 거들떠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 없는 그.. 2025. 7. 20.
지갑 분실, 지갑 없는 하루 : 제주에서 배운 것들 지갑이 없다. 그 사실 하나로 세상이 낯설어졌다. 오늘 아침, 김포에서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하루였다. 탑승 전까지의 과정이 매끄러웠던 탓에, 지갑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제주공항에 내린 후에야 선명하게 다가왔다. 셔츠 안주머니, 가방 안 깊숙이, 비상용 파우치까지 뒤져보아도 감감무소식. 지갑은 김포공항 어딘가에서 내 손을 떠났고, 나는 신분증도 카드도 현금도 없는 상태로 제주도 땅에 발을 내디뎠다. 제주공항에서 제일 먼저 필요했던 것은 신분증이었다. 렌터카도 호텔 체크인도 모두 신분증 없이는 불가능했다. 주민등록증은 물론 운전면허증도 지갑 안에 함께 있었기에, 나는 그날 바로 ‘이동 제한’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 휴대폰은 있었지만, 모바일 신분증조차 등록해 두지.. 2025. 7. 19.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되고, 인생도 정리된다 -휘준- 1. 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되고 인생도 정리된다요즘은 하루에도 수십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들락날락해요.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고, 갑자기 튀어나오는 고민도 많고…근데 정작 그런 복잡한 마음을 말로 꺼내려면?“아 몰라, 그냥… 그렇다고!”이 한마디로 끝날 때 많죠.그런데 글을 쓰기 시작하면, 이상하게 머리가 맑아져요.글을 쓰려면 어쩔 수 없이 '생각 정리'부터 하게 되거든요.예전에 누가 저한테 물었어요.“생각이 정리돼야 글이 써지는 건가요,아니면 글을 쓰다 보면 생각이 정리되는 건가요?”제 대답은 이랬죠.“둘 다요.”진짜 그렇거든요.글을 쓰면 생각이 정리되고, 생각이 정리되면 내가 뭘 원하는지,어떤 사람인지, 지금 뭘 해야 할지가 조금씩 보여요.글쓰기가 ‘나를 마주하는 도구’라는 말, 괜히.. 2025. 7. 18.
자전거 타고, 아이스크림 들고: 우도에서의 반나절 -휘준- 나는 바다를 건너기 전부터 이미 반쯤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성산항에서 배를 기다리며, 작은 선착장에 앉아 파도를 바라보는 순간부터 그랬다. 우도행 배편은 그리 크지 않다. 마치 시골 버스처럼 정겨운 모양새였다.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는 자전거 헬멧을 쓴 젊은이들, 유모차를 민 가족들, 그리고 나처럼 단출한 복장의 여행자들이 뒤섞여 있었다. 배는 출렁이며 15분 남짓의 짧은 항해를 시작했다. 뱃머리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우도를 향해 가는 그 시간은, 여행지로 이동하는 중이 아니라 '또 하나의 여행'처럼 느껴졌다. 바다를 바라보다 보면 생각이 참 단순해진다. “내가 왜 그렇게 바쁘게 살았지?”라는 질문이, 잔잔한 파도에 실려 머릿속을 맴돈다. 파도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답이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 2025.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