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이 없다. 그 사실 하나로 세상이 낯설어졌다. 오늘 아침, 김포에서 제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하루였다. 탑승 전까지의 과정이 매끄러웠던 탓에, 지갑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제주공항에 내린 후에야 선명하게 다가왔다. 셔츠 안주머니, 가방 안 깊숙이, 비상용 파우치까지 뒤져보아도 감감무소식. 지갑은 김포공항 어딘가에서 내 손을 떠났고, 나는 신분증도 카드도 현금도 없는 상태로 제주도 땅에 발을 내디뎠다.
제주공항에서 제일 먼저 필요했던 것은 신분증이었다. 렌터카도 호텔 체크인도 모두 신분증 없이는 불가능했다. 주민등록증은 물론 운전면허증도 지갑 안에 함께 있었기에, 나는 그날 바로 ‘이동 제한’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배우게 되었다. 휴대폰은 있었지만, 모바일 신분증조차 등록해 두지 않았던 나는 한마디로 무력했다.
그때부터는 계획이 아니라 ‘대안’의 시간이었다. 일단 공항 밖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택시를 타자니 현금도 카드도 없고, 버스를 타자니 교통카드가 없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지갑에 의존해 살아왔는지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 와중에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제주 시내버스가 ‘현금보다 카드’를 선호한다는 사실이었다. “현금은 요금 상한이 다릅니다.”라는 문구가 정류장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버스비가 현금이면 1,200원, 교통카드면 1,150원. 그런데 내 손에는 그 1,200원조차 없었다.
나는 버스 기사님께 조심스럽게 다가가 사정을 설명했다. “죄송한데요, 지갑을 잃어버려서 카드도 없고 현금도 없어요. 혹시 계좌이체로 요금을 드리면 안 될까요?” 이 얼마나 어색한 요청인가. 그런데 기사님은 놀랍게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얼마든지요. 계좌번호 드릴게요.”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세상이 열렸다. 그런 일이 잦은 지, 계좌번호 적어서 코팅한 메모지를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제주 시내버스 365번에서 기사님이 알려주신 농협 계좌로 1,200원을 이체했다. ‘제주 버스 요금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이체 메모까지 정성껏 적었다. 입금 완료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기사님은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체 잘 들어왔네요. 좋은 여행 되세요.” 그 웃음 속에서 제주도 사람 특유의 여유와 너그러움이 묻어났다. 나는 그제야 긴장을 조금 풀었다.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새로웠다. 불편하고 불안했던 순간이 뜻밖에 따뜻하게 마무리되었고, 나는 그 덕분에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제주도 첫날을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을 공항 근처의 건물들, 도로 위 오토바이의 흔들림까지도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지갑이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줄었고, 대신 느낄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
그날 하루는 여러모로 이채로웠다. 무엇보다도, 나는 ‘지갑 없는 여행자’로 살아보는 경험을 했다. 애플페이나 삼성페이가 지원되지 않는 상황에서, 계좌이체가 유일한 생존 도구가 된다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아울러 평소에 얼마나 ‘지갑 자동화’된 삶을 살았는지도 깨달았다. 카드 긁고, 신분증 내고, 교통카드 찍는 그 모든 과정이 일종의 '보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보증이 사라진 순간, 나는 다시 사람에게 부탁하고 설명하고 설득해야 했다. 오랜만에 인간적인 접촉을 많이 한 날이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하루쯤 지갑 없이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물론 불편하고 당혹스러웠지만, 그만큼 소중한 걸 많이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타인의 도움 속에서 살고 있는지, 작은 친절 하나가 하루를 어떻게 바꾸는지, 그리고 1,200원이 한 사람을 얼마나 가볍게도, 무겁게도 만들 수 있는지를. 제주의 하늘만큼 푸른 사람들의 마음에 감사하며, 나는 오늘을 기억해두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교훈 하나. 다음부터는 신분증과 카드, 현금을 휴대폰 케이스 안에 따로 넣어두는 습관을 꼭 들이기로 했다. 여행의 시작은 여권이 아니라 지갑이라는 진리를, 이번에는 몸소 겪고 배웠다. 인생은 참, 불편할수록 뭔가 더 선명해진다. 오늘도 그렇게 또 하나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