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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

한라산을 관통하다 : 성판악에서 관음사까지 -휘준-

by 휘준쭌 2025. 7. 22.

한라산을 관통하다 – 성판악에서 관음사까지, 하루의 기록

제주시 관덕정 앞. 아침 5시 30분. 아직 도심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고, 하늘은 희끄무레하다. 낮은 기침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배낭 소리 사이로, 오늘의 결심이 또렷이 일어난다.


나는 한라산을 관통해 오르기로 했다. 성판악에서 정상인 백록담을 지나, 관음사로 내려가는 한라산 종주 코스. 길이는 약 19.2km, 산행 시간은 9시간쯤, 그야말로 한라산을 직선으로 가르는 하루다. 관덕정 맞은편 정류장에서 버스 다니기 전 시간임을 확인하고 택시를 탔다. 차창 밖으로는 서서히 붉어지는 새벽빛이 번진다.

제주시청 정류장에서 281번 버스 첫차(5:45)를 탔다. 성판악 입구 정류장 직전에 버스 하차 벨을 눌러야 서는데 그러지 못해 3정류장을 지나쳤다. 제주 도로 안내전화로 맞은 편에 오는 버스를 물어보려 전화 했으나 그 전화는 7시~22시 사이에만 이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는데 다행히 약 10분 후에 만날 수 있었다.
 


성판악 탐방로 입구에서 출입 확인(전날 신청한 확인서)을 마치고 아침 7시 정각, 본격적인 산행 시작. 길은 비교적 완만하게 시작된다. 그러나 길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 총 9.6km 오름길, 해발 1,100m에서 정상 1,950m까지.


초반엔 숲길이 이어진다. 바닥은 자갈길, 나무 데크, 흙길이 번갈아 나타난다. 물소리도 나고, 바람 소리도 간간이 스친다.
3시간 반쯤 올랐을까,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한다. 이곳까지는 대부분의 오름길이 편안한 흐름이었다. 그러나 대피소를 지나면 상황이 바뀐다. 가파른 경사와 함께, 점점 거칠어지는 바위길.


가끔은 손을 짚으며 올라야 할 정도의 돌계단이 이어진다. 숨은 차고, 땀은 맺힌다. 작년 겨울엔 등 뒤로는 제주시가 광활하게 펼쳐저 자주 감탄을 하며 올라갔는데, 이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정상에도 이러면 어쩌지? 걱정이 일기 시작한다.
 


오전 12시 30분, 드디어 백록담 도착. 정상부에는 바람이 거세다. 백록담은 이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안개가 자욱했다. 맑은 날씨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인증샷도 찍고 주변도 찍고(집에 와서 사진을 펴보니 바람에 옷차림이 말이 아니었다.)
아쉬움에 그냥 내려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주변에서 환호성이 들렸다.


백록담이 조금 보이기 시작한 거다. 와와, 대박 외마디 소리들이 합쳐서 잠시 소란스럽기도 했다. 한라산이 간직한 거대한 분화구. 태고의 힘이 그대로 응축된 듯한 웅장함. 그것이 약 30초간 보였다. 카메라를 꺼낸 내 손도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했다. 정말 장관이었다.  


그리고 다시 구름에 가려진 백록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잠시 바람 속에 앉는다. 그래도 봤으니 다행이다. 하늘에 감사드리며,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산할 마음을 먹는다.
 


이제부터는 관음사 방향 하산. 총 8.7km, 해발 1,950m에서 해발 620m까지의 급경사 하강. 초반은 깎아지른 암릉길이 이어진다. 돌계단과 데크, 철제 난간이 긴장감을 늦추지 못하게 한다. 하산길의 최대 난관은 이 경사. 무릎이 금세 긴장하고, 발바닥이 뜨끈해진다.


하지만 동시에, 좌우로 펼쳐지는 영실기암급 절벽, 구상나무 숲, 습지대, 계곡길이 피로를 잊게 만든다. 삼각봉 대피소에 14시쯤 도착. 이곳에서 잠시 쉬며, 보온병에 담아 온 커피 한 잔을 마신다. 혼자 마시는데도 그 맛이 왠지 깊다. 나도 이 산과 함께 끓는 시간을 보낸 것 같아서일까.
 


삼각봉부터는 경사가 점차 누그러들고, 나무들이 키를 높인다. 구름도 낮게 깔리고, 바람은 숲 사이로만 분다. 물 흐르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드디어 관음사 계곡 입구를 지난다. 발바닥이 많이 아프다.


오후 4시 50분, 관음사 탐방지원센터 도착. 정확히 5분 전에 버스는 지나갔다. 할 수 없이 택시로 제주대 입구까지.
칠순 노인의 걸음으로 대충 10시간의 대장정.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오히려 명료했다. 한라산의 꼭짓점에서부터 뿌리까지 내려온 이 하루가, 내 안에 긴 호흡처럼 남았다.
 
버스 정류장은 탐방센터에서 도보 5분 거리. 관음사입구 정류장에서 475번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하려 했는데 한 시간에 한번 있는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 택시로 제주대 입구 정류장까지 이동했다. 거기서 365번 버스를 갈아타고 관덕정으로 이동하는데 약 30분. 숙소에 돌아와서도 나는 여전히 구름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 여정 요약
출발: 관덕정 → 시청앞까지 가는 대중교통이 없는 시간이라 택시(약 6,000원)이용
시청앞(아라방면) 정류장에서 281번 버스(5:45 첫차 탑승) → 성판악 입구에서 정차 버튼을 눌러야 버스가 서는데,
그러지 못해 3정류장 지나서 하차, 맞은 편 노선 갈아타고 성판악에 6:55 도착 산행 시작:
성판악 → 백록담 (휴식시간 포함 약 5시간)
백록담 → 관음사 하산 (약 4시간 30분)
총 산행 시간 약 9시간 30분
복귀: 관음사입구 정류장 → 475번 버스 → 제주대 입구 정류장 - 관덕정
이렇게 계획하고 갔으나 한 시간쯤에 한번 있는 있는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제주대 입구까지 택시로 이동했다.
택시비 약 5,500원, 버스비는 무료다.
 
이 산행은 단지 산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계절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경험이다. 성판악에서 관음사까지. 이 긴 호흡의 산행이 끝난 후, 나는 조금 더 차분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연은 우리가 찾는 것보다, 우리가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더 크다는 걸 또다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