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이 오면 지갑이 바빠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갑을 열어야 할 ‘사유’가 줄줄이 날아든다.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경조사도 많은 달이 아닌가.
어쩌다 이 많은 날들이 다섯 글자 ‘감사의 마음’에 줄줄이 매달려 있나 싶다.
문자 메시지엔 ‘5월 가정의 달, 풍성한 혜택’이란 광고가 줄줄이 사탕처럼 이어지고,
마트는 빨간 카네이션과 선물 세트로 꽃밭이 된다.
이쯤 되면 5월은 ‘가정의 달’이라기보다 ‘소비의 달’이 아닌가 할 때도 있다.
젊었을 땐 그게 또 신이 났던 때도 있었다.
선물 고르느라 눈이 반짝였고, 카드 한도는 위험했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고르던 선물들은 뻔해지고.
받는 쪽도 “아이고, 이 나이에 또 뭘 다…” 하며 손사래 치는 게 일상이다.
그래서 올해 나는 큰 결심을 했다. ‘지갑은 잠그되, 마음은 활짝 열자!’
먼저 아내부터다. 부부의 날이 되면 늘 무언가를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 느껴지곤 했다.
하지만 그게 꼭 반짝이는 물건일 필요는 없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그래서 아침부터 아내가 좋아하는 미역국을 끓였다. 그날따라 국물이 참 잘 우러났다.
국자를 든 손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고, 식탁 위엔 미리 써둔 손 편지를 조심스레 올렸다.
“여보, 언제부턴가 ‘당연한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나에겐 고마운 사람입니다.
당신 덕에 하루가 부드럽고, 밥이 따뜻합니다. 앞으로도 서로 ‘고맙다’고 말하며 살아가요.”
아내는 국을 먹다 말고, 편지를 읽고는 웃었다. 그러고는 슬며시 말했다.
“작년엔 선물이었고, 올해는 손편지네요. 내년엔 설거지를 선물로 받아볼 수 있을까요?”
어이쿠, 역시 마음을 열면 새로운 청구서(?)도 함께 열린다. 그래도 좋다.
이 한마디에 집안 공기가 하루 종일 훈훈했다.
누군가 그랬다. 사랑은 때때로 ‘돈’이 아니라 ‘시간’으로 측정된다고.
스승의 날도 마찬가지였다.
내게 성경공부를 인도해준 선배님께 작은 음료 쿠폰 하나와 함께 손 편지를 보냈다.
“말씀을 따라 살아보려 애쓰는 마음에 따뜻한 길잡이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믿음이 길을 잃지 않습니다.”
답장은 짧았다.
“저도 덕분에 다시 말씀을 새기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이 말 한 줄이 내 마음을 묵직하게 채웠다. 오히려 내가 더 큰 선물을 받은 듯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누군가에게 기대하는 것도, 누군가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도 결국
돈 들인 정성’이 아니라 ‘마음이 실린 사소함’**이다.
비싼 밥상보다 천천히 들어주는 말 한마디, 고급 선물보다 손글씨로 적은 고마움이 더 오래 기억된다.
물론 세상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여전히 광고는 소비를 부추기고, 비교는 지갑을 자극한다.
하지만 한 걸음만 비껴서 보면, 이 계절은 얼마든지 마음을 열 수 있다.
공원 한 바퀴 돌며 도란도란 나누는 얘기, 커피 한 잔 마시며 꺼내는 사과,
“고맙다”는 말 앞에 머뭇거리지 않는 용기. 이 모든 것이 5월을 아름답게 만든다.
작은 경험이지만, 요즘 나는 문자 말미에 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자주 붙인다.
예전에는 뭔가 어색해서 쓰지 않았던 표현이다.
하지만 이 짧은 다섯 글자가 만드는 온도가 참 따뜻하다.
말은 공짜지만, 마음은 그만큼 값지다.
요즘엔 가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도 즐겨 쓴다.
5월은 ‘주는 달’이 아니라 ‘마음을 보여주는 달’이다.
지갑을 닫아도, 그보다 더 값진 것을 줄 수 있다. 마음이다. 웃음이다. 기억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스며든 계절이 바로, 지금 이 5월이다.
그러니 올해도 다시, 나는 다짐한다.
“지갑은 얇아도 마음부터 열자.”
열린 마음 하나로 누군가의 하루를 따뜻하게 만든다면, 그게 진짜 ‘5월의 선물’ 일 테니까.
** 유리상자(박승화 이세준: 1997년 데뷔)의 '내 마음의 보석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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