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여행 중, 하루쯤은 무계획으로 보내고 싶었다. 맛집 리스트도 없이, 지도도 접어두고, 발이 닿는 대로 걷고 싶었다. 그런 날이었다.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홀짝이며 버스 정류장을 찾아 나섰는데, 눈앞에 느닷없이 조선이 나타났다.
유리벽 건물과 버스, 전동킥보드가 오가는 제주시 구도심 한가운데, 담벼락 하나 넘어 펼쳐진 풍경은 마치 시간의 문이 열린 것처럼 고요했다. “제주목 관아.” 살며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곳이 조선시대 제주 도민의 삶을 지켜보던 행정 중심지라는 걸 알게 됐다.
그저 “관청 유적지겠지” 하며 가볍게 들른 공간이었는데, 막상 마당에 들어서니 이상하게 마음이 조용해졌다. 주변의 차소리, 사람들의 대화가 마치 저 멀리 물가 너머처럼 들린다. 기와지붕 아래로 햇살이 조용히 내려앉고, 나무 그림자는 정자처럼 길게 드리운다. 순간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조선 후기 어딘가에서 출근을 잊은 말단 서리가 된 기분이었다.
건물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단정하다. 직선과 곡선, 돌과 흙, 기둥과 처마가 모두 절제된 미를 품고 있다. 누군가 “한국의 건축미는 비워진 공간에서 온다”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과장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말 대신 구조로 품위를 드러내는 방식. 제주에 와서 이토록 조용하게 감동받을 줄은 몰랐다.
조금 더 걸어가자, 관덕정(觀德亭)이라는 또 다른 고건축물이 나타났다. 이곳은 조선시대 군사들이 활쏘기 연습을 하던 곳이란다. 하지만 지금은 화살 대신 바람이 드나들고, 병사들 대신 노부부가 벤치에 앉아 계셨다. 할아버지는 신문을 보며 졸고 계셨고, 할머니는 고구마를 까고 계셨다. 활은 없어도, 이 풍경엔 ‘정(亭)’의 본래 의미가 살아 있었다. ‘잠시 머물며 세상을 바라보는 곳.’
이 관덕정은 제주도민의 마음에도 오래도록 남은 장소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목사의 연설을 듣거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한다. 지금은 연설 대신 비둘기가 모여든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슬며시 생각했다. 과연 조선시대엔 비둘기가 목사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까? 어처구니없는 상상을 하며 관덕정 기둥에 등을 기대고 앉아보았다.
눈앞엔 오가는 차들, 뒤로는 시장 골목, 그 사이에서 이 고건축물 둘은 아주 담담하게 서 있다. 세월이 많이 흘러도 이들은 “여기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기억되고 싶거나, 소란 떨고 싶지 않다는 듯, 그저 조용히, 그렇지만 꾸준하게, 누군가에게 쉼과 시선을 내어주는 모습이었다.
관아를 천천히 걸으며 나는 과거에 대한 추억이 아닌, 현재의 나에 대한 사색을 했다. 이 바쁜 도심의 중심에서, 이렇게 고요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 돈 한 푼 들지 않고도 마음이 맑아지는 경험. 이런 걸 우리는 '공짜지만 비싼 경험'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입장료는 1,500원. 카페 커피 반 잔 값도 안 되는 돈으로 나는 조선시대 공무원들의 일터와 활터를 거닐었다. 하지만 진짜 값진 건 돈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잠깐 멈춰 섰다는 사실, 그 자체가 오늘 여행의 소득이었다.
돌아 나오는 길, 관덕정 앞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이 “여기 뭐 하는 데야?” 하고 묻는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답했다. “여기는 옛날 사람들도 지금처럼 바쁘게 살았을 거야. 하지만 하루쯤은 여기 앉아 하늘도 보고, 바람도 듣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을 거야. 너희들도 가끔은 그렇게 쉬어야 해.”
물론, 큰 소리는 내지 않았다. 그랬다간 ‘수상한 아저씨’로 찍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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