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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나는 허수아비 진짜 허수아비 -휘준-

by 휘준차 2025. 3. 12.

허수아비 /휘준

 

"오케바리?"

전철에 막 오르려는데 누가 귀에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문간에 선 한 청년이 핸드폰을 받고 있었고 내 귀가 그의 입을 스친 꼴이었다. 문이 닫히자 차내가 조용해지고 그의 목소리도 줄어들었다. 그는 제 친구와 약속 장소를 정하는 모양인데 '찾아올 수 있겠지?'라는 뜻으로 그 말을 외쳤던 것이다.

그놈의 "오케바리?"

외모도 준수한 청년이 여자친구의 머리칼을 연신 쓰다듬으며 말끝마다 ‘오케바리?’를 연발했다. 주위의 눈총도 모르는 체 상스러운 말투로 전화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이 둘은 흔한 말대로 '한 쌍의 바퀴벌레' 같았다. 전철이 서고 문이 열리자 소음이 커지고 그의 목소리도 다시 커졌다.

 

"XX놈아 앞대가리에 타면 바로 2번 출구로 나온다니까. 앞대가리에 타! 오케바리?"

불쾌했다. 말투뿐만 아니라 엉겨 붙듯 서 있는 모습이. 필경 부부라도 그렇지 이른 시간이 아닌가. 아무리 보아도 스물쯤인 아가씨는 오히려 전화를 바꿔 달라고 한술 더 뜬다. 그러더니 이번엔 아가씨가 덧붙인다.

"꽁까지 말고 나와. 너 XX 빠셔버릴꺼야."

누구에게 밀쳤을까. 그들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간 나는 말아 쥔 신문지로 청년을 살금 건드리고 '조금 조용히 갑시다.'하고 타이르려 했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웃치 민 분노가 전철의 흔들림에 실려 그의 옆구리를 세게 찌르고 말았다. 청년이 "윽!" 소리를 내며 웅크리고 주위 사람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내가 돌았나? 주위에서 도와줄까? 놀란 가슴에도 생각은 번개처럼 스치고 비굴한 표정으로 실수임을 설명하려던 나는 눈을 부릅떴다. 정면돌파, 이럴 땐 기선제압이 상책이라는 생각으로 이마에 주름을 잡고 턱을 들며 사투리를 쓰기로 했다.

"쬐까 조용히 갔으면 쓰겄는디"

그리고 그다음 말까지 사투리로 할 줄 몰라 신문지를 바닥에 팽개쳤다. 신문지도 낭패스러운 듯 나동그라졌다. 후회스러웠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어차피 한 판 벌려야 했다. 노려보았다. 눈싸움에 지면 당한다는 생각으로. 암팡지게 멱살이라도 잡으려는데 그의 눈꼬리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입속말인 듯 들렸다.

"죄송합니다."

목청 컸던 청년의 작아진 목소리에 팽팽했던 공기가 수런수런 풀어지고 그의 등 뒤로 따라 내리던 아가씨가 흘끗 돌아볼 때까지 볼심 패이도록 어금니를 물고 있었지만 낸들 한켠에 미안한 마음이 없었으랴. 신문지를 주워 펴 들고 나는 긴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긴박한 상황에서 나를 구해 준 사투리는 군대시절 최병장의 말투다. 최병장은 하늘같이 무서운 고참이었는데 제대한 뒤에도 꿈에 나타나 특이한 억양으로 나를 괴롭히곤 했었다. 그래서 내게 깡패처럼 각인된 사람이지만 그의 강렬한 인상은 영판 다른 데 있다.

휴가를 같이 나오던 어느 날, 그는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전화를 걸었는데 "엄마, 난데..."로 시작되는 대화에 두 번이나 놀랐었다. 망나니가 아니라 천진스런 아이 같음에 놀랐고 집에 전화가 있을 만큼 넉넉한 집 자식이라는데 놀랐다.

어린 학생들의 가정환경 조사항목에 TV나 전화가 빠짐없이 들어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가끔 오래 산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 시절엔 친구보다는 어른들께 전화드릴 일이 많았는데 어쩌다 일이 생기면 인사말과 용건을 미리 연습해 보고 다이얼을 돌리곤 했었다. 전화란 그렇게 대하기 어려웠고 그 예절 또한 그러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어디까지 믿어 줄까.

전철을 내려도 깊은 땅속이다. 출구를 찾아 종종걸음 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콧노래를 부른다.

"아침이 밝는구나-, 희망은 새롭구나-"

아파트 현관을 나서며 얼핏 들은 '참새의 하루'란 노래인데 까닭 없이 자꾸 되뇌어진다. 평소에 흘려듣던 노래를 나도 모르게 흥얼대다 터무니없는 기억력에 놀라곤 했는데 오늘은 이 노래가 왜 자꾸 입에 도는지. 오늘 아침 기분과는 어울리지도 않는데.

"오늘-도 어제처럼 낟알갱-이 주우러 나가봐야지-"

옆을 스치던 아가씨 하나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려 내 노래를 끊는다. 웬 여자의 너털웃음? 깜짝 놀라 쳐다보니 나를 보며 "내가 코드 뽑혔니?"하고 묻는다. 실성한 여자다. 그런데 옷차림이 너무 단정하다 싶어 걸음을 멈추었다. 모퉁이를 돌아가는 코드 뽑힌 여자의 귀에 꽂힌 이어폰, 그녀는 통화 중이었다. 귀가 막힌 여자는 기가 막힌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했구나.

"피식-"

나도 모르게 웃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번엔 앞을 지나던 두 학생이 동시에 나를 본다. 마치 코드 뽑힌 남자를 보듯. 걸음을 옮기며 나는 다시 흥얼거린다.

"희망은 새롭구나- 햇볕이 따갑구나-"

아침인데도 햇살이 따갑다. 셔틀버스는 아직 보이지 않는데 핸드폰이 운다. 출근시간에 웬 전화인가 했더니 막내 녀석이다. 방과 후 친구들과 놀이동산에 가려면 이만 원이 필요한데 엄마가 아빠한테 허락을 받으라고 했단다. 통화를 오래 할 수 없어 쉬이 승낙을 했더니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제 어미 쪽으로 소리를 치고 있었다.

"오케바리- 아빠 짱이야!"

언제 왔는지 셔틀버스가 빵빵댄다. 빨리 안 타고 뭐 하냐고. 코드 뽑힌 남자의 입 속엔 웅얼웅얼 노래가 남아 있는데.

'오늘도 허수아비 뽐을 내며 깡통소리만 울려대겠지-'

계속 귓전에 맴돌던 소리

'나는 허수아비인가?'

(2001년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