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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첫 키스 도둑 -휘준-

by 휘준차 2025. 3. 1.

눈부신 아침이다.

햇살은 팔랑대는 아내의 옷고름에 자줏빛으로 부서진다. 약국을 지나 가구점 거울에 뒷모습을 살짝 비춰 보며, 비녀가 정말 어울리냐고 물어보는 아내가 예쁘다. 자주색 저고리에 연보라 치마. 허리까지 빗질하던 긴 머리를 쪽 쪄 올려 목이 하얗게 드러난 여자. 쪽 찐 머리 옆에서 내 아내가 맞나 다시 쳐다본다.

이런 외출이 얼마 만인가. 참 드물었다. 결혼 20년 동안 손가락으로 셀만큼. 연애시절까지 24년의 연륜이지만 한복 차림의 아내는 또 다른 새로움이다. 환한 아내의 표정. 오랜 세월 무던히도 순종해 준 아내에게 난 몇 점쯤 되는 남편일까.

20년은 아내가 억척 여인으로 변한 세월이기도 하다. 맞벌이에,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집안 잔일에 종종걸음을 친 세월이다. 이사도 8번이나 했지만 한 번도 내가 고르거나 계약한 집이 없다. 이재에 밝지 못해 이사가 귀찮다고 투정만 한 남편. 사는 재주가 빵점인 내가 지금의 요량쯤 살기 까진 아내의 억척 때문인 것을 주변 사람들은 다 안다.

그래도 알량한 남편을 늘 존대해온 여자. 그런 아내에게 선물도 변변히 해본 기억이 없다. 선물뿐인가. 길거리에 흔한 과일들, 끝물에 싸게 판다는 생선, 내가 신을 양말 한 켤레, 어느 것 하나 들고 다니지 못했다. 말뿐인 선물 약속도 잊어버린 듯 아이들이 소풍 때 사 온 팔찌나 머리핀에 더 행복해 한 여자. 그런 아내와 오늘은 닷새의 냉전이 끝난 날이다.

사랑은 싸울수록 쌓이는 것일까. 그동안 티격태격 많이도 부딪혔지만 이번 냉전은 가장 길었고 그 끝이 보이지 않았었다. 아내가 '이혼'운운했기 때문이다. 결혼 20주년 기념 여행을 의논하다 이혼이라니! 충격이었다. 그런 말은 내 집 울타리 밖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인 줄 알았는데..... 설령 없던 일로 무마되더라도 이미 우리 모두에게 상처가 되어버린 단어 '이혼'이란 말은 다시는 꺼낼 수 없도록 나는 완벽히 이기고 싶었다.

그러나 냉전이 길어지면서 아내가 애처롭기도 했다. 얼마나 속상했으면 그랬을까. 그동안 싸움의 원인이란 게 나의 술버릇이 전부이고 보면 승패를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생각해 보면 서로 오래 사랑하자는 이야기들 아니었나.

늘 옳은 설득에 남자의 자존심만으로 눌러온 내 꼴이 밉기도 했다. 종종 기억까지 끊기도록 마셔대는 음주벽에 늦은 귀가. 술주정이 없었어도 잘한 일이 없는데 나는 무얼 더 바라는가. 사과하리라. 화해를 결심했지만 좀체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런데 어제 아침, 머뭇머뭇 아내가 말을 붙여왔다. 자기 친구들의 부부동반 모임에 나올 수 있냐고. 속마음과는 달리 무뚝뚝하게 장소를 물었지만 내심 화해의 기회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모처럼 선물도 필요할 것 같아 시내로 나가는 길에 백화점에 들른 것이 일을 어그러뜨리고 말았다.

지하 주차장에 반 시간이나 갇히는 바람에 약속시간에 늦고 만 것이다. 친구들 틈에 토라져 있을 아내가 보이지 않았다. 가버린 여자는 내가 핸드폰 불통 지역에서 헤매는 동안 집으로 전화를 걸었단다. 집엔 아들아이뿐이었는데 다짜고짜 물었단다.

 

   "지금 뭐 해요?" 끝에 '요'자는 붙는 둥 마는 둥.

   "테레비 봐."

   "당신 정말 그럴 거예욧?"

   찰칵, 전화를 끊은 아내는 뾰루퉁 나가버렸단다. 이타저타 말도 없이. 혹시 집에 갔을까 싶어 전화를 했더니 아들 녀석이 싱긋댄다.

    "아빠, 내가 감기 땜에 목소리 좀 깔았더니 엄만 괜히 화를 내던데?"

나와 아들의 목소리를 혼동한 아내는 그 시간에 집에 있는 남편이 약속 장소에 올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들 녀석 때문에 바람맞은 날. 혼자 집에 오는 길은 많은 생각들이 따라왔다.

날로 의젓해지는 아들아이의 대견스러움. 새침하던 아내를 처음 만나던 추억. 그때 그녀 나이만큼 잘 자라준 딸. 아들에게 화를 내는 아내 모습. 모두가 사랑인데 일은 왜 이리 꼬일까.

무거운 마음으로 열기 싫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남편에게 바람맞은 아내는 제 키만 한 아들 뒤에 숨어서 아들 때문에 바람맞은 남편에게 빙긋 웃었다.

나는 신발장에 준비해 둔 벽보를 꺼냈다. 낱장에 한 글자씩 쓴 종이를 끝부터 거꾸로 붙여나가고 아들아이는 따라 읽는다.

 

"음, 걸, 첫, 의, 국, 애, 은, 랑, 사, 내, 아"

우리의 냉전은 그렇게 끝났다.

햇살이 포근한 거리. 정말 잘해 주리란 다짐으로 팔짱을 끼며 다시 한번 아내를 쳐다본다. 쑥스럽다며 눈을 가리는 아내. 나란히 걸으며 더 꼬옥 안는다. 이번엔 옷고름이 날려 눈을 가린다. 옷고름에 퍼뜩 스치는 첫 키스의 설렘. 그렇다 그때 그 마음으로 돌아가자. 군인시절 함께 어머니 산소를 찾은 날이었다.

잔디 위의 아지랑이 신기하던 날, 풀꽃을 찾던 그녀에게 관상을 봐 주겠노라고 마주 앉혔었다. 손수건을 옷고름 너비로 접어서 이마에서 턱까지 재고, 가로로 양 볼을 잰 뒤, 조금 올려서 관자놀이 사이를 잰답시고 눈을 가렸다.

남은 건 입술을 훔치는 일뿐.

병영으로 돌아온 후엔 편지마다 '첫키스의 병사로부터'라고 맺으며 키스를 나눈 사이임을 짓궂게 우겨대기도 했지만 손수건을 접으며 그땐 얼마나 망설였던가. 화를 내면 어쩌나. 두근대는 가슴으로 작전(?)을 도모하던, 그때 그 마음으로 아내를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20여 년. 고마움뿐인 세월. 남은 세월은 또 얼마나 빠를까. 더 이상 다투며 살 시간이 없다.

이따금 살랑대는 바람. 바람결이 좋다. 팔랑팔랑 옷고름이 내 뺨이며 입술을 쓰다듬고 간다. 아내의 손끝처럼 용서의 손길처럼. 이 고운 아내의 소망은 무엇이던가. 크리스천 남편. 아니 건성으로라도 교회에 같이 가주는 남편이면 좋다고 했었다. 들어주리라. 첫 키스 때의 망설임처럼 아내를 어려워할 줄 알면서 살아가야 한다.

 

이마 위의 햇살이 간지럽다. (2000.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