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날, 아침부터 만원 전철에 시달리는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그러나 출근시간을 조금만 늦추면 사람들 틈은 훨씬 넓어진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가는 행운을 얻을 때도 있다. 게다가 시야에 화사하거나 노출이 멋진 여인이 있을 땐 억세게 운수 좋은 날. 아름다운 여인이 옆에 있는 날엔 내 차림새를 한 번 보게 된다.
빗물 떨어지는 우산 끝에 귀퉁이가 젖은 종이 가방이 올려다본 샐러리맨. 자주 들기 싫은 그것에는 아내가 다려준 근무복 3벌이 담겨 있다. 일주일 치를 한꺼번에 가져가라는 아내의 지혜를 선반 위에 가만히 올려놓고, 말쑥한 척 옷매무새를 고쳐 선다.
앞엔 젊은 여인. 하얀 목 뒤로 가느다란 목걸이가 둥글지 않게 얹힌 모습에서 땀기운을 느끼며, 출입문이 열릴 때마다 향기를 흠흠거린다. 등 뒤로 훤히 비치는 브래지어 끈에 생각을 빼앗겼다가 나는 흠칫 놀라기도 한다.
브래지어, 사춘기 시절엔 낯선 집 빨랫줄에 걸린 그것만 보아도 얼굴이 붉어지곤 했다. 그 시절 여인네의 옷차림은 여름철에도 속옷을 갖춰 입어서 그것의 윤곽이 잘 드러나지 않았고, 요즘처럼 광고나 쇼우윈도에서 구경할 기회도 없었다.
교복대신 염색한 전투복 바지에 헌 군화를 너풀대던 얄개시절, 여학생들의 하얀 교복 안에 숨어있는 그것이 왜 그렇게 궁금했을까. 어린 시절 그런 호기심 탓인지 나는 아내와 언제 돌이켜도 좋은 추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진짜 군화를 신고 휴전선을 누비던 군인시절, 마지막 휴가 때 2년여 교제 중이던 아내에게 나는 좀 별난 프러포즈를 하였었다. 대낮에 종로를 걸으며 군 생활의 어려움을 자랑처럼 뻥 튀기던 날은 소나기가 그친 날이었다. 아내의 어깨 위에 얹었던 손을 등 뒤로 내려 브래지어 끈을 조금 잡아당겼다 놓았다.
"찰싹"
습기 찬 날의 작은 고무줄 소리가 "어머!"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동그래진 눈을 보며 이다음에 이 끈은 내가 풀을 수 있게 해달라고 했었다. 나는 애교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폭력이라 생각했던 듯싶다. 나만 들을 수 있었던 '찰싹' 소리를 그녀는 주위에 온통 들켜버린 수치라 생각했는지 얼굴이 발그스름해졌다.
어찌할까, 어정쩡한 나는 놀람을 다독이려 다시 그녀의 등에 손을 얹었는데 그때 대답이 튀어나왔다.
"네, 알겠어요."
학생이 선생님 채근을 피하듯, 끈을 또 튕길까 봐 겁이 난 듯 그렇게 언약은 나에게 왔었다. 대답이 즉각적이란 면에선 실망스러웠지만 NO나 NO COMMENT보다는 얼마나 좋은 것인가! 그러나 훗날 내가 합법적으로 그 끈을 풀 수 있게 된 날, 정작 그날은 어둠 속에서 쩔쩔맸던 일이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웃음을 주곤 하는 추억이다. 그리고 그 '찰싹' 소리는 지금도 우리 사이에 사랑의 신호로 쓰이고 있다.
그런 브래지어가 요즘은 사방에 널려있다. 주변의 반투명한 옷차림에, 길거리 좌판 위에, 고급 상가 마네킹에... 배꼽까지 내보이는 패션의 변화로 그것의 다종다양한 모양까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게 됐다.
아무튼 좋다. 나는 정말 저들의 발랄함이 고맙다. 그리고 외모만큼이나 자유분방한 패기는 각자가 속한 사회에서 제 몫을 다 해낼 것임에 그들의 힘을 존중한다. 그래서 나는 저들이 만든 제도와 저들이 가꾼 세상에서의 실버생활을 기대하고 있다.
내 마음 벌써 늙은 것일까, 천장을 쳐다보는데 건너편에 자리가 난다. 자리를 중심으로 서있는 사람이 넷, 내가 제일 가까우니 그건 내 자리다. 그러나 노약자가 없는지 나보다 더 먼저 움직이기 시작한 사람이 있는지를 재빨리 살펴야 한다. 없다. 나는 적절한 체면에 빠른 속도를 붙여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내 구두 옆으로 가지런한 매니큐어 발톱 열 개가 또 예쁘다. 아주 짧은 스커트의 앞단에 핸드백을 올려놓고 핸드폰을 달그락거리는 아가씨 옆자리. 통로에 서서 동료와 환담 중에도 양쪽에 자리가 날 땐 미련 없이 찢어지는, 어느새 그런 나이임에도 젊은 아낙에게 자주 눈길을 두는 것은 어쩐지 죄스러운 일 같아서 옷섶을 당기고 눈을 감는다.
그런데 잠을 청해도 자꾸자꾸 실눈이 떠진다. 에라 눈을 뜨자 했던 데가 사당역이었던가, 이번엔 핫팬츠에 속눈썹까지 단, 노출이 싱그런 아가씨가 타더니 내 앞에 당당히 선다. 팬츠 군데군데 올이 뜯긴 선까지 곡선인 풍만함이 바로 눈앞에 있다. 그런데 자꾸 보아도 잡혀가지 않는 세상이 참 좋은 세상이라는 것.
좋다, 그래 좋은 세상이다. 실눈 속 세상은 바느질 땀까지 셀 수 있는 핫팬츠의 정면과 실목걸이 늘씬한 미니스커트의 뒷모습으로 빵빵하다. 듀얼 스크린?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옆자리도 "좋은 아침!"... 끄떡이다 고개만 들면 그들은 언제나 내 눈앞에 있다. 눈을 떠도 있고 눈을 감아도 있다.
아! 이렇게 횡재스런 날은 필시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정말 좋은 아침! 곡선미에 넋을 놓았는지 실눈에 졸음이 들었는지 어느새 내릴 곳, 참 빨리도 왔다고 생각하며 허겁지겁 출구를 빠져나와 우산을 폈을 때, 아뿔싸! 다른 손이 허전했다.... 종이 빽!
아으 다롱디리-- 날랜 낼스망정 --
캐비닛에 빨랫감으로 달랑 남은 근무복 하나로 일주일을 버텨야 하는 건 둘째고 마누라의 서슬도 참을 수 있지만, 신발주머니와 우산을 번갈아 잃어버리고 온 막내 녀석을 혼내주고 나온 게 오늘 아침인데.....
어쩌란 말이냐 기찬 기차야.(2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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