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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연금은 들어오는데, 마음이 새는 날엔 -휘준-

by 휘준쭌 2025. 6. 9.

매달 25일, 어김없이 연금이 들어온다.


알림음도 없이 조용히 들어오는데, 그 조용함이란 참 어지간하다. 마치 혼자 밥 차려먹고 설거지까지 다 마친 날의 고요함처럼. 일은 다 끝났는데 어쩐지 허전한 그런 느낌이다.

지갑은 쫀쫀한데 마음이 헐렁하다.

마음이 새는 날은 어쩌지?
마음이 새는 날은 어쩌지?


예전에는 돈이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이젠 쓸 일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이게 사치인가, 숙명인가, 나도 모르겠다.

허전한 날엔 뭐라도 산다.


어느 날은 그랬다. 아내는 친구랑 약속이 있다며 일찍 나가고, 나는 혼자 늦은 아침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문득 허전해졌다. 바람은 따뜻했고 해는 쨍했지만, 속은 좀 비어 있었다. 어쩐지 아내 몰래 뭔가를 사야 할 것 같은 날이다.

그래서 컴퓨터를 켰다.


‘뭘 좀 사볼까’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손이 자연스럽게 마우스를 잡는다. 그러다 ‘중년 남성용 경량 패딩’을 클릭했는데, 이게 또 색상이 참 곱다. 네이비블루, 내 얼굴색과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은 착각.

“지금 사면 무료배송 + 에코백 증정”
이 문구는 무슨 마법의 주문인지. 나는 그날 나 자신에게 속절없이 졌다.

 

패딩이 도착한 날, 아내가 박스를 뜯으며 말했다.
“여보, 같은 거 작년에 사지 않으셨어요?”
… 그랬다. 같은 색에, 같은 사이즈였다. 작년 것도 아직 태그를 안 뗐는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새고 있을까.


정작 필요한 건 옷이 아니었다.
그날 나에게 필요한 건 누군가와의 대화, 혹은 따뜻한 한 끼 밥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자꾸 ‘물건’으로 메우려 하니, 집엔 박스만 쌓이고 마음은 계속 샌다. 그건 마치 구멍 난 고무장갑으로 설거지를 하는 것과 같다. 장갑을 꼈는데도 손은 축축한 날.

 

감정 소비, 이렇게 막읍시다.
이제는 좀 배웠다. 똑같은 실수는 두세 번만 반복하면 슬슬 지갑이 눈치를 주기 시작한다.
그래서 만든 나만의 감정 소비 방지 팁을 소개한다.

  1. 24시간 숙성법
    무언가 사고 싶을 땐, 그냥 장바구니에만 담아놓고 잔다.
    신기하게도 하루만 지나면 ‘그게 뭐였더라?’ 싶어진다.
    진짜 필요한 건 자꾸 생각나고, 감정적 소비는 금방 잊힌다.
  2. 지출일기 쓰기
    언제, 왜, 뭘 샀는지 적다 보면 내 감정 패턴이 보인다.
    “아내와 말다툼한 날은 단팥빵을 산다.”
    “기분 좋은 날은 책을 산다.”
    이걸 알면 돈보다 마음을 먼저 챙기게 된다.
  3. 지름 대신 걷기
    무언가 사고 싶을 때는 무조건 동네를 한 바퀴 돈다.
    이상하게 걷고 나면 사고 싶은 마음이 반으로 줄어든다.
    거기에 도토리 줍고, 하늘 사진 찍고, 친구한테 카톡 한 줄 쓰면 그날의 소비는 0원이다.
  4. 말로 푸는 소비
    물건 대신 ‘말’을 쓰는 연습을 했다.
    글을 쓰고, 전화를 걸고, 아내한테 얘기하는 시간은 돈이 들지 않는데, 만족감은 비싸다.
    요즘은 내 글이 ‘나를 위한 심리상담’ 같은 역할을 한다.
    물건 대신 문장을 소유하니, 마음이 좀 덜 샌다.

지갑은 잠그고 마음은 열며, 우리는 결국 소비로 감정을 다스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게 옷이든 빵이든, 고급 안마의자든 결국은 ‘괜찮아지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하지만 그 괜찮아지고 싶은 마음을, 굳이 3개월 할부 6개월 할부로 갚을 필요는 없지 않나.
비어 있는 건 마음이었고, 그것은 글 한 줄로도 충분히 메워질 수 있다.

 

요즘 나는 지갑을 열기 전에 일기장을 먼저 연다.
패딩 대신, 문장을 산다.
그건 택배로도 오지 않고, 사이즈도 딱 맞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샌 날엔 참 따뜻하다. 필요 없는 걸 사지 않는 하루,
그 하루를 모아 마음 통장에 예금하는 중이다.
이율은 느리지만, 이자가 ‘평온’이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