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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핸드폰을 목에 건 어머니는 척척박사 -휘준-

by 휘준쭌 2025. 6. 7.

우리가 새 천년이 열렸다며 들떠있던 2000년대 초반, 제 어머니는 여든 문턱에 계셨습니다.

 

어머니와 핸드폰
어머니는 핸드폰 덕분에 척척박사

 

작고 날씬하신 어머니는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해를 몹시 힘겨워하셨습니다. 무릎도 자주 아프고 기운도 예전같이 않으시다면서. 어머니는 보약을 드신 적이 없습니다. 힘들어하실 적마다 권해드려도 한사코 마다하셨습니다. 보약을 먹으면 죽을 때 고생한다는 잘못된 상식을 굳게 믿고 계시지만 자식의 씀씀이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셨겠지요. 그 어머니에겐 홀로 된 큰며느리와 저희 부부, 손자 둘 손녀 둘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그마한 집도 있습니다. 그 집 때문에 혼자 사십니다.

 

2002년, 저는 살던 동네에서 조금 외곽으로 나오면서 같은 값에 방이 하나 더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방 넷 중 큰 방 하나를 4년째 비워놓고 있는데, 어머니는 한 달에 일주일쯤 다녀 가실 뿐입니다. 아직은 아들 며느리 간섭을 받기 싫고, 정든 동네를 떠날 수 없다는 주장이십니다.

 

혼자 사는 어머니는 경로당에도 다니지 않습니다. 냄새나는 영감님들이 꼴 보기 싫답니다. 고집이 세고 유독 사교성도 없는 어머니에게 집으로 찾아오는 친구 몇 분이 계십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요. 친구들 중 혼자 집을 지니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노인 혼자 사는 집이 드나들기 편한 모양입니다.

 

그들은 당신들의 자식 흉을 보다가 제 어머니를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혼자 사는 노인을 위한 공치사일 수도 있는데, 어머니는 그때마다 으쓱해하십니다. 어머니 주변에, 얹혀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 제 집 방 하나는 계속 비어 있을 것 같습니다. 속상합니다.

 

어머니는 마실도 자주 다니십니다. 바람직한 일이지만 며칠씩 연락이 안 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어머니께 핸드폰을 권했을 때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보약보다 훨씬 비싼데도 그때만큼은 자식의 씀씀이를 생각하기 싫으신 것 같았어요. 오래전부터 핸드폰을 갖고 싶었는데 말씀을 못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핸드폰을 목에 걸고 다니시면서 어머니는 활발해지셨습니다. 어머니껜 핸드폰이 보약보다 나은 거였죠. 기력도 나아지신 듯 보였는데, 저희 집에 오시는 횟수는 오히려 줄었습니다. 거침없이 다니시는 어머니에게 핸드폰은 든든한 나침반이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는 것도 많으십니다. 그런데 알고 계신 게 틀려도 좀체 굽히시지 않는 게 문제입니다. 그러나 제가 설명을 드리면 다릅니다. 하나 남은 아들이거든요.

 

한일 월드컵 때 어머니와 친구할머니를 모시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모처럼 아들이 옆에 있어 우쭐하신 어머니는 칠순이신 친구를 '맹한 데가 있지만 길눈이 밝아 데리고 다니는 할머니'로 소개했습니다. 데리고 다니는 관계는 거꾸로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지하철엔 빈자리가 하나 있었는데 어머니가 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선 옆에 좁은 틈을 손으로 두드리며 친구를 부르는 통에 졸던 옆 사람이 깨어 일어났습니다. 어머니는 당신 덕분에 자리에 앉게 된 친구를 흐뭇하게 쳐다보았습니다. 친구할머니는 머쓱한 지 핸드폰을 무릎에 놓고 자랑했습니다.

 

“아따 내 껀 새 건데 왜 이렇게 진동이 약하디야?󰡓

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지하에 있어서 그랴- 지하에, 지하는 진동이 잘 안 와."

친구할머니가 다시 물었습니다.

"집에서도 잘 모르겠던데?"

어머니는 답답하신 듯 친구할머니 무릎을 쳤습니다.

"이이구 이 맹추야, 그땐 거는 사람이 지하에 있었겠지--"

그러면서 어머니는 확인시키려는 듯 친구할 머니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친구할머니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엥, 지금은 또 쎄네! 지하인디?"

 

저는 어머니 말문이 막힐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아이고 이 맹추야, 바로 옆에서 거니까 쎄지!"

 

어머니는 저를 쳐다봤습니다. 내가 이런 늙은이 하고 다니느라 답답하다는 듯이. 저는 끄덕이는 친구할머니를 보면서 제 어머니가 틀렸다고 설명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는 게 병'이라는 말이 있듯이, 모르는 게 약일 때도 많은 세상입니다. 저는 소심해서 일을 그르친 때가 많습니다. 특히 늦게 시작한 문학에 있어서는 더욱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좀 더 헌걸차게 덤벼볼 생각입니다. 짧은 지식으로도 거침없는 악동처럼. 엉터리 상식으로도 자신만만하게 사시는 어머니를 닮아볼까 합니다.

 

제 어머니는 여든 문턱을 힘겨워하셨지만, 핸드폰 덕분인지 아흔 고개에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