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문을 넘는 순간, 궁궐의 표정이 달라졌다
덕수궁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첫 감정은 ‘가까움’이다. 오늘은 돌담길 안쪽에서 만난 가장 인간적인 궁궐에 대해 풀어보고자 한다. 다른 궁궐들이 일정한 거리와 각도를 유지한 채 방문자를 맞이한다면, 덕수궁은 한 발짝 더 다가와 말을 건다. 대한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서울 도심의 소음이 갑자기 사라지지는 않는다. 대신 그 소음이 낮아진다. 완전히 차단하지 않고, 조금 남겨 두는 방식. 그 점이 덕수궁을 더 현실적인 공간으로 만든다.
이 궁궐은 조선의 시작이 아니라 끝에 가까운 시간을 품고 있다. 왕조의 마지막을 향해 가던 시기, 격변의 시대를 통과하던 고종의 거처. 그래서일까. 덕수궁에는 웅장함보다 복잡한 감정이 먼저 배어 있다. 단정한 전각 사이로 서양식 석조건물이 불쑥 나타나고, 전통 기와와 돌계단이 묘하게 한 화면에 공존한다.
처음엔 이 조합이 낯설다. 그러나 몇 걸음 걷다 보면, 이질감은 곧 이해로 바뀐다. 이 궁궐은 정제된 이상향이 아니라, 실제로 흔들리며 살았던 공간이기 때문이다. 나라가 흔들리고, 왕이 흔들리고, 시대 자체가 방향을 잃었던 그 시간의 흔적이 덕수궁 곳곳에 남아 있다. 그래서 이곳에 서면, 역사는 교과서보다 훨씬 인간적인 얼굴로 다가온다.
중화전 마당에서, 늦은 왕조의 무게를 보다
중화전 앞마당은 덕수궁의 중심이다. 그러나 그 중심은 결코 당당하지 않다. 경복궁의 근정전처럼 모든 것을 압도하지도, 창덕궁의 인정전처럼 자연과 균형을 이루지도 않는다. 대신 중화전은 묵직하게, 그러나 조용히 서 있다. 마치 많은 말을 하지 않는 노년의 어른처럼.
중화전은 대한제국 시기 황제가 공식 업무를 보던 공간이다. ‘황제’라는 호칭이 말해주듯, 이곳에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넘어가려던 마지막 몸부림이 담겨 있다. 그러나 마당에 서서 건물을 바라보면, 그 의지는 이미 현실의 무게에 눌려 있는 듯하다. 크지 않은 전각, 절제된 장식, 그리고 어딘가 비워진 공간감.
나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잠시 눈을 돌렸다. 전각 뒤편으로 보이는 도심의 건물들, 궁 바깥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덕수궁은 늘 도시와 맞닿아 있다. 담장을 높이 쌓아 세상과 선을 긋지 않았다. 어쩌면 그럴 수 없었던 시대였을 것이다. 그 점이 덕수궁을 더 쓸쓸하게, 동시에 더 솔직하게 만든다. 이곳의 권위는 외침이 아니라 체념에 가깝고, 위엄은 과시가 아니라 버팀에 가깝다.
석조전과 돌담길, 덕수궁이 남긴 한 문장
덕수궁의 상징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석조전과 돌담길을 함께 떠올린다. 서양식 석조 건물인 석조전은 처음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궁궐 안에 궁궐답지 않은 건물이 서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나라가 겪어야 했던 혼란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또한 당시로서는 최선을 다한 선택이었음을 알게 된다.
전통과 근대, 동양과 서양이 어색하게나마 한 공간에 공존했던 흔적. 석조전은 실패의 상징이 아니라, 전환기의 기록이다. 완성되지 못했기에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리고 덕수궁 돌담길. 이 궁궐을 나서며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이 길을 선택한다. 돌담을 따라 걷는 동안, 발걸음은 자연스레 느려진다. 담장 위로 고개를 내민 나무들, 일정하지 않은 돌의 결, 그 위로 스며드는 햇빛. 이 길에는 설명판도, 큰 사건도 없다. 그저 걷는 시간만이 있다.
나는 돌담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덕수궁이 우리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이런 태도가 아닐까 하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시대의 요구에 맞추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흔들릴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흔들림마저 기록으로 남길 용기.
덕수궁은 말한다. 끝에 서 있었던 궁궐이기에, 시작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고. 그래서 이곳을 다녀오면 마음이 묘하게 조용해진다. 성공의 역사보다, 견딘 역사가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을 이 궁궐이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덕수궁을 나서며 다시 한 번 뒤를 돌아본다. 크지 않은 궁궐,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간.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은 자리. 덕수궁은 그렇게 오늘도 서울의 심장 옆에서 조용히 늙어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늙어감이, 참으로 품위 있다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