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보다 먼저 마음이 피어나는 곳
입구에서부터 마음이 느려지다
아침고요수목원의 문을 들어서는 순간,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일부러 천천히 걷자고 다짐한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안다. 이곳에서는 서두를 일이 없다는 것을. 도심에서는 늘 신호를 기다리고, 시간을 재고, 목적지를 계산하며 걷지만, 수목원의 길은 목적보다 과정이 앞선다. 어디까지 가야 한다는 표지보다,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지가 더 중요해진다.
입구를 지나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화려한 꽃이 아니라 나무였다. 그 나무는 굳이 말을 걸지 않는다. 다만 “괜찮다, 서둘지 않아도 된다”는 표정으로 서 있을 뿐이다. 꽃이 사람을 부르고, 사진을 찍게 만드는 존재라면, 나무는 사람을 멈추게 만든다. 그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게 된다. 숨이 고르게 되면, 마음도 같이 고른다.
이곳의 길은 참 친절하다. 곧게 뻗은 길도 있지만, 대부분은 살짝 휘어 있다. 마치 인생이 그렇다는 듯이. 직선으로만 가는 길은 재미도 없고, 오래 걷기엔 부담스럽다. 수목원의 길은 “조금 돌아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길이다. 그래서인지 걸음을 옮길수록 생각도 부드러워진다. 굳이 결론을 내리지 않아도 되는 생각들, 답을 찾지 않아도 되는 질문들이 조용히 고개를 든다.
꽃을 보며 지난 계절을 떠올리다
아침고요수목원의 꽃들은 경쟁하지 않는다. 누가 더 화려한지, 누가 더 많은 시선을 받는지 따지지 않는다. 제철에 피고, 때가 되면 물러난다. 그 단순한 질서가 이곳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나는 그 꽃들을 보며 내 지난 계절들을 떠올렸다. 한때는 활짝 피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시절, 늦게 피면 뒤처진 것 같아 조급해하던 마음들.
하지만 이곳의 꽃들은 늦게 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천히 피었기에 더 오래 머문다.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쉽게 지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 역시 너무 빨리 피려고 애썼던 건 아니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사람도 꽃처럼 각자의 계절이 있는데, 우리는 자꾸 남의 달력을 들여다본다.
수목원 한켠의 작은 화단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특별히 이름난 꽃도 아니고, 사진 명소도 아닌 곳이었다. 그런데 그 앞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아마도 그 꽃들이 “나를 보러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주목받지 않아도, 제 몫의 자리를 지키며 피어 있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이 세상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꽃 사이를 걷다 보니, 어느새 나도 조금 가벼워졌다. 꼭 필요하지 않은 걱정들,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가 꽃잎처럼 떨어져 나갔다. 이곳에서는 생각조차 자연의 일부가 되는 느낌이다. 억지로 정리하지 않아도, 바람과 햇빛이 대신 정리해준다.
돌아오는 길에 남는 것들
수목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오면서, 나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사진 몇 장이면 충분할까, 아니면 기념품 가게에서 작은 화분 하나쯤 사야 할까. 하지만 결국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신 마음 한켠에 조용한 문장 하나가 남았다. “오늘은 이만하면 잘 살았다.”
아침고요수목원의 가장 큰 선물은 화려한 풍경이 아니라, 그 문장이었다. 하루를 평가할 때 늘 더 잘했어야 한다고, 아직 부족하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나에게, 이곳은 말해준다. 잘하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냥 이렇게 걸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돌아오는 길의 발걸음은 들어올 때보다 조금 단단했다. 무언가를 결심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 힘을 빼고 걷는 법을, 이곳에서 다시 배웠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 계속 힘을 주고 버티기만 하면 오래 걷기 어렵다. 가끔은 이렇게 자연 속에서 힘을 내려놓아야, 다시 자기 길로 돌아갈 수 있다.
아침고요수목원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지만, 그 속에 흐르는 태도는 늘 같다. 조급해하지 말 것, 비교하지 말 것, 그리고 오늘의 빛을 충분히 받을 것. 그 단순한 태도가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다. 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며 그 태도를 흉내 내본다. 오늘 하루, 조금 느려도 괜찮다. 꽃보다 먼저, 마음이 피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