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과 올해 나는 거침없이 다녔다. 작년엔 칠순기념 산행 10곳, 올해도 백록담 3번, 백운대와 대청봉 1번씩. 어디를 가도 7학년은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거침없던 나에게 큰 거침이 생겼다. 아내다. 잘 달리던 내가 아내가 걸어오는 딴지에 꼼짝 못 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주 토요일, 운명의 대결이 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아들과 며느리. 테니스 경기인데 내기의 크기는 100만원쯤 걸린 것이다. 아들아이가 여행 2박 3일 같이 갑시다며 내기를 건 것이다. 이름은 경주 APEC 뒤땅밟기. 여행 경비 전액이 걸린 ‘세대 간 혼합복식'을 치뤄야 하는데 아내가 말을 안 듣는다.
아들은 테니스 선수였다. 그런 아들과 맞붙으려면 며느리 쪽을 주로 공격해서, 아들아이가 무리한 커버 플레이를 하게끔 해야 실수가 나온다. 작전은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혼합복식에서 여성을 공격하는 건 세계적 추세라고 설명해도 아내가 말을 듣지 않는다. 문제다. 내기 액수도 크고 존심상 나는 질 수가 없다.
나 역시 전공인 국문학은 시원찮았어도 체육과 친구들은 많았다. 테니스도 꽤 쳤다. 무엇보다 나는 ‘할배 능력자’가 되는 게 꿈이다. 아직 초짜 블로거고 아장아장 유튜버지만, 사진 찍는 방법부터 자습서로 배운 초짜, 이글 마지막에 붙이는 유튜브도 자습서로 배운 실력이다. 그런 나에게 백만 원 내기는 참으로 큰돈이다.
블로그엔 수필을 쓰고, 유튜브엔 테니스 연습 영상을 올리며 7학년의 콘텐츠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과천 전체 테니스장에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몇 없다. 산에 올라가도 내 또래는 보기 힘들다. 나는 꼭 이길 것이다.
며느리는 아직 2년차 초보자다. 하지만 젊음이라는 무서운 에너지가 있다. 요즘 자주 운동 나가서 구슬땀을 흘린다더니, 스윙 폼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이게 문제다. 내년까진 아마 우리가 이길 것이다. 그런데 후년부터는 장담 못 한다. 며느리의 성장 속도가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그때엔 내기 게임 안 하면 된다.'
며칠 전, 아내와 전략 회의를 했다.
“이번 내기, 이기려면 며느리를 집중 공격해야 해.”
내가 그랬더니, 아내가 정색한다.
“그건 안 돼요. 가족끼리 그런 비신사적인 전략을 써요?”
“비신사적이라니? 이건 스포츠의 기본이야. 혼합복식은 약한 쪽을 노리는 게 세계적 추세잖아.”
“나는 정직하게, 결대로 칠 거예요. 약한 사람 공략해서 이긴 승리는 기쁘지 않아요.”
“아니, 당신… 이건 내기가 걸린 테니스야."
아내는 끝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져도 괜찮아요. 져도 즐겁게, 품위 있게 질래요.”
나는 속으로 ‘그 품위에 여행비 100만 원이 걸려 있다고…’라고 중얼거렸지만, 겉으론 웃었다.
우리 부부의 이런 대화는 늘 그렇다.
나는 현실주의, 아내는 낭만주의?.
나는 효율을 따지고, 아내는 품격을 지킨다.
며느리와의 첫 연습 경기 날, 나는 정말 자신이 있었다.
“며느리, 준비됐나?”
“아버님, 살살 부탁드려요~”
나는 첫 서브부터 직선 구질로 강하게 넣었다.
그러나 며느리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퍽!’
깔끔한 리턴, 그것도 정중앙. 옆에서 아들이 외쳤다.
“좋아, 그거야! 그대로!”
순간 나는 깨달았다. 며느리는 곧 무서운 초보자가 될 것이란 걸.
점수는 순식간에 러브 써리. 내 서브게임인데...
각자 한 게임씩, 네 게임으로 끝냈다. 온게임을 다 하기는 의미가 없었다.
요즘 아내와 다시 연습을 한다.
나는 여전히 “며느리를 공략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지만
아내는 “그럴 바엔 차라리 여행비를 내지”라고 말한다.
결국 타협안을 냈다.
“진 팀이 여행비를 책임지되, 이긴 팀이 저녁 두 끼는 사기.”
이건 일종의 ‘평화 협정’이다. 아내는 품위를 지키고, 나는 전략을 세운다.
생각해 보면, 이런 내기야말로 인생의 축소판이다.
이기고 지는 건 순간이고, 함께 땀 흘린 시간은 오래 남겠지.
공 하나, 웃음 하나, 그리고 하나 된 가족이면 충분하다.
며느리의 포핸드가 가끔 무섭게 들어와도
아내의 미소는 자애로웠다. 그런데 백만 원이 내 주머니에서 나가도 그 표정이 남아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