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도 소리, 잊힌 시간의 속삭임
제주의 8월, 한라산의 품도 푸근하지만 역시 백미는 바다다. 햇살에 부서지는 푸른 물결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안겨준다. 그런데 자세히 귀 기울여 보렴. 파도 소리가 그저 철썩이는 물소리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거대한 숨을 내쉬었다 들이쉬는 듯한, 묵직하고 규칙적인 바다의 울림은 마치 대자연의 심장 소리처럼 들린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70년 살아온 내 심장 박동도 덩달아 고요하고 느리게 흘러가는 듯하다.
젊은 날의 나는 이 바다를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거친 파도에 맞서 싸우고,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속에서 나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었다. 망망대해를 향한 알 수 없는 열정으로 가득 찼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삶의 파도를 수없이 넘나들면서, 이제 바다는 정복이 아닌 '대화'의 대상이 되었다. 바다는 묵묵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뱉어내는 존재다. 밀려왔다 사라지는 파도처럼, 삶의 수많은 기억들 또한 그렇게 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떤 기억은 깊은 심해 속으로 가라앉아 영원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어떤 기억은 잔잔한 물결처럼 수면 위를 맴돌다 이내 부서진다.
이 8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며 앉아 있노라면, 망각 속에 갇혀 있던 아련한 얼굴들이 떠오르곤 한다. 첫사랑의 풋풋한 미소, 젊은 날 함께 웃고 울었던 친구들의 얼굴, 먼저 떠나보낸 부모님의 다정한 목소리. 그 모든 기억들이 마치 바다 밑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던 조개들이 파도에 밀려 해변으로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둘씩 떠올라 내 마음에 닿는다. 슬픔과 회한보다는, 고마움과 그리움이 먼저 스친다. 그것이 바다의 위로이자, 70년 세월이 내게 준 선물이다. 바다 앞에서, 나는 망각 속에 갇혔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새롭게 호흡하게 한다.
바다의 색, 삶의 희로애락을 품다
제주의 바다는 시간과 날씨에 따라 천의 얼굴을 가진다. 햇살이 강한 한낮에는 영롱한 에메랄드빛으로 빛나고, 흐린 날에는 짙은 코발트블루로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해 질 녘에는 노을에 물들어 붉고 보랏빛으로 타오르다가, 밤이 되면 모든 색을 삼켜버린 채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침묵 속에 잠긴다. 이 다채로운 바다의 색은 마치 인간의 삶에 녹아있는 희로애락과도 같았다.
내 70년의 삶에도 수많은 색이 있었다. 젊은 날의 열정은 한여름 태양 아래 빛나는 바다처럼 강렬했고, 사랑의 기쁨은 에메랄드빛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웠다. 좌절과 고통은 먹구름 낀 바다처럼 암울하고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으며, 이별의 슬픔은 차갑고 쓸쓸한 회색빛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색깔의 파도 속에서도 나는 결국 다시 일어섰고, 그 모든 감정들이 나를 더욱 깊이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주었다. 바다의 색이 변한다고 하여 바다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삶의 색깔이 아무리 변할지라도 나의 본질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어떤 날은 푸른 바다의 심장 소리에 맞춰 경쾌하게 춤을 추듯 걸었고, 어떤 날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며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결국 바다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 고요한 침묵 속으로 돌아왔다. 바다의 쉼 없는 순환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삶의 어떤 감정, 어떤 기억도 영원히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슬픔이 지나면 기쁨이 오고, 좌절 뒤에는 희망이 찾아온다. 그 모든 것이 삶이라는 큰 바다를 이루는 파편들이며, 덧없는 시간 속에서도 영원히 가슴에 남는 기억들이 결국 삶의 깊이를 더한다는 것을 말이다. 사진 촬영을 즐겨 하는 나로서도, 바다의 이 수많은 색을 카메라 렌즈에 담으려는 시도는 늘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 순간은 창조적 몰입의 극치였고, 나는 그렇게 바다와 하나가 되었다.
바다 끝,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채우다
8월의 뜨거운 바다 앞에서 나는 또 한 번 깊은 숨을 들이쉰다. 이 푸른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수평선 너머로 아스라이 펼쳐진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젊은 날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망이 저 수평선을 향하게 했다면, 이제는 저 바다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가만히 응시하게 된다. 두려움보다는, 잔잔한 호기심과 함께 담담한 수용의 마음이 앞선다.
바다는 모든 것을 삼키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품어낸다. 잊힌 듯 사라진 기억들도 바다 어딘가에는 고요히 잠들어 있을 것이다. 인생이란 결국 기억과 망각 사이를 오가는 기나긴 항해와 같았다. 수없이 많은 파도를 넘고, 때로는 폭풍우를 만나 좌초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여정 속에서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깨달았으며,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 달에 천 달러를 버는 목표는 어쩌면 이 바다처럼 광대하고 아득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한 땀 한 땀,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결국 저 수평선에 닿을 수 있음을.
제주 8월의 바다는 나에게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삶 전체를 비추는 거울이었고, 동시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를 포용해줄 어머니의 품과 같았다.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나의 존재를 되새긴다. 이제 나는 망각의 두려움보다는 기억의 소중함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내 가슴 속에 영원히 남을 소중한 기억들을 더 많이 만들어 갈 것이다. 이 푸른 바다의 심장 소리는 70년의 삶을 지나온 내게, 앞으로도 쉼 없이 뛰는 삶의 활력과 지혜를 안겨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