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동쪽 남원과 표선을 잇는 가시리 녹산로는 가을이 되면 ‘억새의 왕국’으로 변신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로 양옆으로 억새가 하얀 파도를 이루며 흔들리고, 그 길 끝에는 소박하면서도 매혹적인 따라비 오름이 우뚝 서 있다. 누군가는 이 길을 ‘억새 고속도로’라 부르고, 또 다른 이는 ‘가을의 대형 카펫’이라 한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상관없다. 그저 가을 바람에 스치는 억새의 물결을 따라가다 보면, 마음까지도 하얗게 씻기는 듯하다.
녹산로, 억새의 바다 위를 달리다
9월 말이 되면 가시리 녹산로는 차창을 열고 달리기만 해도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길 양옆의 억새가 바람에 일제히 고개를 흔들면, 마치 ‘어서 와, 가을 여행자!’ 하고 환영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햇살에 비친 억새의 은빛은 고급 샴페인 거품처럼 반짝이고, 그 위에 떠 있는 파란 하늘은 배경 캔버스다.
운전자는 잠시 속도를 줄이고 창밖으로 시선을 빼앗기고 만다. 동승자는 “앞 좀 봐요!”라며 타박하지만, 그 말 속에도 감탄이 숨어 있다. 사실 녹산로에서 ‘앞’은 도로가 아니라 끝없이 펼쳐진 억새다. 억새가 차를 따라 달려오는 착각 속에서 우리는 ‘가을에만 가능한 자동차 패션쇼’의 모델이 된다.
간혹 길가에 세워둔 자전거 여행자도 눈에 띈다. 땀에 젖은 얼굴인데도 눈빛만은 반짝인다. 억새밭을 배경으로 달리는 순간, 광고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일 테다. 물론 현실은 바람에 머리카락이 온통 헝클어져서 사진 찍으면 “누구세요?”가 나오지만, 그것조차 추억의 양념이 된다.
따라비 오름, 전망대에 오른다는 것
억새의 바다를 지나 녹산로가 끝날 즈음, 따라비 오름이 등장한다. 이름이 다소 장난스럽지만, 풍경은 진지하다. 오름 초입부터 이어지는 억새 군락은 이미 ‘따라비만의 환영식’을 차려놓은 듯하다.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오르면, 숨은 조금 가빠지지만 마음은 점점 시원해진다.
정상에 오르면 눈앞이 확 트인다. 남쪽으로는 파란 바다가 펼쳐지고, 멀리 산방산이 묵직하게 앉아 있다. 서쪽으로는 웅장한 한라산이 든든히 버티고 있어, 마치 ‘오름의 보호자’처럼 느껴진다. 사방을 둘러보면 가을빛 제주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순간만큼은 누구나 마음속에 작은 함성을 지른다. “아, 이래서 오름에 오르는구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자세도 다양하다. 팔을 활짝 벌려 억새와 하나 된 듯 포즈를 취하는 청춘, 삼각대를 세워 ‘노을과 억새’를 동시에 담으려는 아마추어 사진가, 그리고 “얘야, 사진은 됐고 빨리 내려가자” 하며 간식 봉지를 꺼내 드는 부모님까지. 따라비 오름 정상은 풍경보다도 사람들의 모습이 더 정겹다.
억새가 전하는 인생의 비밀
억새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인생의 비밀 몇 가지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억새는 바람에 흔들리되 꺾이지 않고, 모두 같은 방향으로 흐르듯 움직인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바람 부는 날은 흔들려도 좋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또 억새밭을 걷다 보면, 마치 ‘수많은 길 중 하나’를 택해 걷는 기분이 든다. 억새는 어디서든 비슷해 보여도, 그 속을 들어가면 매번 다른 풍경을 선물한다. 인생길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보기엔 별 차이 없어 보여도, 걸어보는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가 피어난다. 억새밭이 가르쳐주는 건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당신만의 길을 걸으라’는 무언의 조언이다.
따라비 오름을 오르다 보면 작은 웃음들이 생긴다. 예컨대, 어떤 중년 아저씨가 힘겹게 오르며 “아이고, 이게 왜 따라비냐, 따라오라비지!” 하고 투덜대는 소리. 옆에 있던 부인은 “당신은 안 불러도 잘 따라오잖아”라며 능청스럽게 받아친다. 결국 두 사람은 웃으며 정상에 도착한다. 오름은 부부싸움도 화해시키는 최고의 중재자다.
또 어떤 젊은이는 억새밭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겠다며 여러 번 점프샷을 시도한다. 그런데 억새보다 본인이 더 흔들려서, 결국 사진은 ‘심령 현상’처럼 찍혔다. 그걸 보고 다 함께 웃는다. 억새가 흔들리는 게 문제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사람이 더 흔들리고 있었던 셈이다.
여행의 끝, 바람을 데려오다
따라비 오름을 내려오며 억새밭을 다시 스쳐 지나갈 때, 마음 한쪽이 시원하게 비워지는 느낌이 든다. 바람은 오름에서 얻어온 기념품이고, 억새의 은빛은 눈에 남은 선물이다. 차에 올라 녹산로를 다시 달리면, 억새는 또다시 고개를 흔들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사진을 아무리 찍어도 그날의 공기와 바람까지 담을 수는 없다. 결국 여행은 ‘기록’보다 ‘기억’이 남는다. 억새밭을 걷던 발자국,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 그리고 웃으며 주고받은 농담들이야말로 진짜 기념품이다.
가시리 녹산로와 따라비 오름은 9월 말에서 10월로 이어지는 계절의 교차로에서 가장 빛나는 풍경을 선물한다. 끝없이 흔들리는 억새는 우리에게 ‘흔들려도 괜찮다’는 위로를 주고, 정상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삶의 지평이 얼마나 넓은지를 일깨운다.
이 길을 걷다 보면 깨닫는다. 여행이란 단순히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풍경 속에서 ‘나를 다시 만나는 일’이라는 것을. 억새밭에 서면 마음속 고민도 억새처럼 가볍게 흔들리다가 결국 바람에 흩어져 버린다. 정상에서 사방으로 펼쳐진 시야는 ‘나는 생각보다 작은 존재가 아니구나’라는 용기를 준다. 바람은 귓가에 속삭인다. “너도 이 가을의 일부야.”
특히 따라비 오름의 정상에서 바라본 한라산과 남쪽 바다, 그리고 저 멀리 산방산까지의 풍경은 한 편의 그림이다. 그러나 그림과 다른 점은, 그 안에서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종종 사진에 풍경을 가두려 하지만, 사실 풍경이 우리를 품고 있다는 걸 잊는다. 따라비 오름은 그 사실을 가장 크게 일깨워주는 ‘가을의 교실’ 같은 곳이다.
혹시 제주에서 가을을 만끽하고 싶다면, 이 길을 꼭 걸어보시라. 자동차로 달려도, 자전거로 지나쳐도, 천천히 걸어 올라가도 좋다. 그 끝에는 늘 억새의 바람과 푸른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마주한 바람과 빛, 억새의 흔들림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여행의 진짜 기념품이 될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도, 지친 하루에 문득 창밖을 바라보다가 억새의 흔들림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 순간 여행은 여전히 내 곁에 살아 있는 셈이다. 그래서 가시리 녹산로와 따라비 오름은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라,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아 계절마다 꺼내볼 수 있는 ‘가을의 기억 저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