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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휴애리 자연생활공원, 가을 산책의 핑크빛 초대장

by 휘주니 2025. 11. 4.

휴애리, 마음에 남은 사진
휴애리, 마음에 남은 사진

  제주 남원에 자리한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은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휴(休)’는 쉼이요, ‘애리(愛里)’는 사랑의 마을이라니, 이보다 따뜻한 초대장이 있을까. 이름만 들어도 벌써 벤치에 앉아 쉬고 싶은 기분이 드는데, 9월의 휴애리는 그야말로 계절의 화원, 아니, 가을 풍경의 종합선물세트다. 코스모스가 바람에 설레고, 핑크뮬리가 분홍빛 연기를 피워 올리며, 방문객들의 마음은 어느새 동심으로 회귀한다. 이쯤 되면 ‘공원 산책은 무료로 받는 심리치료’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코스모스, 가을의 손편지

 

 휴애리를 찾는 9월의 첫인상은 단연 코스모스다. 길가와 정원마다 심어놓은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릴 때면, 마치 누군가 오래된 편지지에 꾹꾹 눌러쓴 가을의 편지를 받아 드는 기분이 된다. 꽃잎은 얇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깊다. 연인들은 코스모스 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다가도 어느새 ‘이 길이 우리 둘의 미래길’이라고 농담 섞인 고백을 한다. 부모님 손잡고 온 아이들은 꽃잎을 가만히 뜯어보며 “이건 별처럼 생겼어!” 하고 감탄한다.

 

 그 풍경을 지켜보는 나 같은 노년 여행자는, 잠시 코스모스의 ‘수줍은 흔들림’을 빌려 내 청춘 시절을 떠올린다. 누군가에게 고백을 망설이다 말았던, 그 아련한 시절 말이다. 꽃은 늘 우리보다 앞서 계절을 살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며 조용히 배운다. ‘흔들리되 꺾이지 않는 법’을.

 

핑크뮬리, 분홍빛 착시의 마술

 

 휴애리의 가을 풍경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핑크뮬리 때문이다. 9월이 되면 공원 곳곳이 분홍 구름에 잠긴 듯한 풍경으로 변한다. 바람이 불면 솜사탕처럼 흩날리는 그 장관은, 어른들에게는 피곤한 삶을 잠시 잊게 해 주고, 아이들에게는 동화 속 무대가 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인생샷’을 건진다며 분주하다. 핑크뮬리 앞에서는 나이 불문, 모두가 모델이 된다. 어떤 아저씨는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진 것도 잊고 ‘멋진 중년’ 포즈를 잡는다. 어떤 할머니는 분홍 물결 속에서 손자를 안고 활짝 웃는다. 결국 핑크뮬리는 사진 배경이 아니라, 사람들의 ‘행복한 순간’을 찍어내는 보이지 않는 카메라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며 ‘분홍빛은 화장품에서만 나는 게 아니구나’ 하고 감탄한다. 인생이 아무리 무겁고 회색빛 같아도, 이렇게 분홍빛 장막 속을 걸으면, 잠시라도 마음에 필터가 씌워진다. 그야말로 천연 심리 보정장치다.

 

가족과 함께 걷는 길

 

 휴애리는 단순한 꽃구경 장소를 넘어 가족과 연인 단위로 즐기기에 좋은 테마공원이다.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잔디밭, 동물들과 교감할 수 있는 체험 공간, 계절마다 바뀌는 꽃 축제까지. 특히 부모님 세대에게는 ‘아, 요즘은 이런 식으로 자연을 꾸미는구나’라는 신선한 감탄을, 청춘 연인들에게는 ‘우리의 계절을 사진으로 남기자’는 설렘을 준다.

 

 어느 가족은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먹는다. 김밥 한 줄에 코스모스 향기가 배어들어, 왠지 고급 뷔페보다 값지게 느껴진다. 또 다른 커플은 분홍빛 억새 사이에서 서로를 찍어주며 “조금만 더 웃어봐”라며 티격태격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구경꾼들마저 미소 짓는다.

 

 결국 공원이란, 꽃과 나무보다 사람의 이야기가 더 빛나는 공간이다. 휴애리는 그 무대를 넉넉하게 마련해 두고, 방문객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자유롭게 펼치도록 배경만 제공한다.

 

공원의 작은 발견들

 

 휴애리를 산책하다 보면 꽃과 핑크뮬리 외에도 소소한 즐거움이 많다. 작은 연못에 떠 있는 잉어를 보며 아이들이 “저건 금붕어의 할아버지야!” 하고 놀리는 소리, 공원 구석에 자리한 흙냄새 진한 길을 걸을 때 느껴지는 고향 같은 향기. 그리고 곳곳에 놓인 의자들은 ‘당신이 잠시 쉬어가길 기다리는 자리’다.

 

 한쪽에는 전통가옥 모형이 있어 옛 제주 생활상을 엿볼 수도 있다. 초가집 처마 밑에 앉아 있으면, 마치 그 옛날 할아버지댁에 놀러 온 듯한 기분이 든다. 바쁜 여행 일정 중에도 이런 소소한 정취가 주는 여유가 참 고맙다.

 

 공원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여행은 결국 ‘웃음’이 남는다. 그날 나는 핑크뮬리 앞에서 사진을 찍다가 무심코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곧장 주워 들었는데, 옆에 있던 꼬마가 “삼촌, 핸드폰도 분홍색이 됐어요!”라며 깔깔 웃는다. 순간 나는 ‘아, 핑크뮬리의 진짜 마술은 웃음을 만들어내는 거구나’ 하고 깨달았다.

 

 또 다른 장면도 있다. 코스모스 밭에서 어떤 젊은이가 여자친구에게 꽃잎 하나를 따주며 “이 꽃은 너 닮았어”라고 말하는데, 뒤에서 지켜보던 친구가 “흔들리는 건 똑같네”라며 끼어든다. 여자친구는 웃다가도 삐치고, 남자는 진땀을 빼며 변명을 한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코스모스가 연애 상담까지 맡는구나’ 하고 피식 웃었다.

 

여행의 끝, 마음에 남는 것

 

 휴애리를 다녀온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머릿속에는 분홍빛 풍경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진첩을 아무리 넘겨도 그날의 공기를 온전히 담아낼 순 없었다. 결국 여행은 카메라가 아니라 가슴속 필름에 기록되는 법이다. 나는 그날, 가을의 시작을 꽃으로 확인했고, 사람들의 웃음을 통해 계절의 풍요를 느꼈다. 무엇보다도 ‘잠시 쉬어가도 괜찮다’는 위로를 공원 곳곳에서 얻었다. 이름 그대로, 휴애리는 쉼과 사랑이 공존하는 마을이었다.

 

 9월의 휴애리 자연생활공원은 그저 ‘꽃놀이 명소’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코스모스의 수줍음, 핑크뮬리의 화려함, 가족과 연인의 따뜻한 장면들, 그리고 소소한 웃음까지.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거대한 ‘가을 앨범’을 만든다. 여행객은 그 앨범 속 한 장면에 자연스레 들어가 주인공이 된다.

 

 사람들은 흔히 제주 여행에서 바다와 오름만 떠올리지만, 휴애리를 거닐고 나면 ‘꽃으로 기억되는 제주’라는 새로운 풍경이 마음에 자리한다. 특히 가을의 공원은 누구에게나 맞춤형 배경을 선물한다. 연인에게는 핑크빛 추억을, 가족에게는 웃음이 섞인 사진을, 나 같은 중년에게는 ‘오늘 하루, 참 잘 살았다’는 뿌듯한 쉼표를 준다.

 

 혹시 제주 남원까지 여행 계획이 있다면, 가을 햇살 좋은 날 꼭 휴애리를 거닐어 보시라. 그 길 끝에서 당신은 분명 웃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코스모스처럼 흔들리면서, 핑크뮬리처럼 빛나면서. 결국 여행의 진짜 기념품은 사진이 아니라, 마음에 남은 풍경이 아닐까. 그리고 그 풍경은, 내년 가을에도 다시 꺼내볼 수 있는 가장 든든한 기억의 보물상자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