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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

도심 한복판에 숨은 한 줄기 쉼 : 용연계곡의 오후 -휘준-

by 휘준쭌 2025. 7. 11.

도심 한복판에 숨은 한 줄기 쉼
 


제주 여행은 늘 바깥으로 향한다. 해안선을 따라 달리거나, 산굽이마다 숨어 있는 감성 카페를 찾아 나선다. 그런데 가끔은, 그 바깥에서 너무 멀리 돌아 나와, 정작 안쪽 풍경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내가 제주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순간, 제주도는 살며시 귓가에 속삭인다. “아직 날 다 안게 아닌 거야.”
 
그렇게 찾아간 곳이 바로 용연계곡이다.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도심 안에 그런 ‘계곡’이 있다는 말에 선뜻 상상이 가지 않았다. ‘용두암 근처에 있는 물가겠지’ 싶은 정도였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이건 물가 정도가 아니라 도심 속에 통째로 숨겨진 또 다른 제주였다.
 
입구는 무심하게 열려 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를 리 없건만, 모두 바삐 걸음을 옮기기 바쁘다. 나는 일부러 속도를 늦췄다. 작은 다리를 건너고, 살짝 굽이진 길을 따라 걸었다. 그러자, 갑자기 바람의 성질이 달라졌다. 도시의 소음이 살짝 접히고, 대신 계곡물 소리가 귓가를 건드린다. “어서 오세요. 여기는 제주 도심 속 숲입니다.”
 
용연계곡은 길지 않다. 하지만 그 짧은 구간에 빽빽한 숲과 바위, 조용한 물길, 그리고 깍지 낀 커플들이 은근히 조화를 이룬다. 자연과 인간, 흐름과 고요, 낭만과 식곤증이 뒤섞인 곳. 나는 한편으론 감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약간 투덜거렸다. “이런 데가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왔지.”
 
계곡을 따라 조금 더 걸으면, 드디어 용연 구름다리가 나타난다. ‘구름다리’라는 말에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약간 고소공포증이 있다. 서울의 한강대교도 중앙선만 보면 발에 땀이 찬다. 그래서 ‘구름다리’라는 단어만으로도 어딘가 긴장했는데, 막상 보니 아담하고 귀엽기 그지없었다. 철제 다리 위에 덱이 깔려 있어 튼튼하고, 그리 높지도 않다. 이름은 구름인데, 실제로는 낮은 구름, 혹은 이슬 머금은 아침 구름 같은 다리다.
 
다리 한가운데서 멈춰 섰다. 양쪽으로 펼쳐진 계곡과 바위들, 그리고 다리 아래로 흐르는 잔잔한 물줄기. 생각보다 수심이 깊다고 한다. 예전엔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도 있단다. “어라, 내가 그런 전설도 모르고 왔단 말이야?” 괜스레 민망해져 휴대폰으로 정보를 뒤적였고, 그러다 문득 이 생각이 들었다. “전설은 몰라도 괜찮아. 지금 이 풍경이 이미 충분하니까.”
 
용연 구름다리는 오래 머물러도 되는 곳이다. 다리 양옆으로는 앉을 수 있는 벤치가 있고, 사람들 대부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풍경을 바라본다. 아무 말 없이. 옆에 앉은 한 노부부는 작은 오이를 까서 나눠 먹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몰래 힐끔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오이를 나눠 먹는 것도 낭만이구나.” 혼자 여행 중이던 나는 괜히 물 한 모금 삼켰다. 아무 맛도 안 나는 생수인데, 왠지 짭조름한 맛이 났다.
 
이 계곡은 밤에도 멋지다. 야간 조명이 은은하게 계곡 위를 비추고, 다리 아래 물빛은 달빛에 반사되어 살짝 흔들린다. 도시의 불빛과 자연의 어둠이 섞여 만들어내는 중간 톤. 그것이 용연계곡의 밤이다. 여긴 낮보다 밤에 더 와닿는 공간이기도 하다. 시끄러운 낮을 지나, 조용한 밤에 진짜 ‘쉼’이라는 두 글자가 마음에 와닿는다.
 
돌아 나오는 길, 나는 다시 다리 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바람이 살짝 불었다. 여름 바람치고는 시원하고, 솔잎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바람치고는 부드러웠다. 그 바람이 내 귓가에 무언가 말한 것 같았다. “너도 잠깐 쉬어가.”
 
여행은 늘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지만, 때로는 멈추는 법도 배워야 한다. 용연계곡과 구름다리는 그런 ‘멈춤’을 가르쳐주는 공간이다. 짧지만 깊은, 작지만 넉넉한, 눈에 보이는 것보다 마음에 남는 여정이었다. 우리는 먼바다 보다 가까운 물가에서 더 큰 평화를 얻을지도 모른다. 
 


구름다리에서 느린 걸음으로 10분 이내애 도착하는 곳이 용두암이다. 화산이 솟구칠 때 용의 머리 같은 바위가 생긴 것이다. 서너 번 와봤지만 그 뒷모습은 오늘 처음 봤고, 뒷모습은 아무 모양도 아니었다;. 뒷모습을 볼 수 있는 자리엔 인어아가씨 석상이 있는데, 양쪽 유방에 손 때가  많이 타서 시커멓다. 짓궂은 사람들이 유방을 만지고 지나간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