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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섬에 마음을 두고, 아직은 친구들 곁에 산다

by 휘주니 2025. 12. 28.

 

제주도 갈등의 풍경
제주도 길등의 풍경

 

제주엔 세 달 살아봤다. 처음 오래 머문 것은 작년, 한 달 살아보겠다고 섬에 들어갔지만, 사실은 ‘살아본다’기보다 ‘지켜본다’에 가까웠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곳에 몸을 맡긴다는 건 설렘보다 조심스러움이 먼저 온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어디쯤 와 있는지, 마음은 또 어디에 남아 있는지부터 살핀다.

 

창을 열면 바람이 먼저 들어왔다. 젊었을 땐 바람을 배경으로 여겼지만, 이제는 대화 상대로 느껴진다. 오늘은 세구나, 오늘은 오래 머무는구나. 바람이 그러면 나도 그 속도를 따른다. 제주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올해는 두 달을 살았다. 한 달과 두 달의 차이는 크다. 한 달은 낯섦으로 버틸 수 있지만, 두 달부터는 생활이 말을 걸어온다. 병원이 어디 있는지, 비 오는 날 미끄러운 길은 어떤지, 겨울을 나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지 같은 질문들이다. 젊었을 땐 ‘괜찮다’로 넘길 일들이 이제는 하나하나 점검 대상이 된다.

 

제주에 정착한 이주민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다들 처음엔 행복이 더 컸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애환이 쌓인다고도 했다. 섬은 조용하지만, 그 조용함을 나누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관계는 쉽게 시작되지 않고, 한 번 멀어지면 다시 잇기도 어렵다. 그 말을 들으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나 역시 이제는 사람 하나를 새로 들이는 데 예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제주에는 분명한 기쁨이 있었다. 하루가 짧아진다기보다, 하루가 단순해진다. 해가 뜨면 움직이고, 해가 지면 쉰다. 남과 비교할 일도 줄어든다. 무엇을 더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도 희미해진다. 이 나이에 그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을, 제주에서는 자주 하게 된다.

 

하지만 결심은 거기까지였다. 돌아갈 곳을 떠올리면 얼굴들이 먼저 떠오른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 말수가 줄어도 어색하지 않은 관계들. 건강 얘기, 자식 얘기, 옛날 얘기를 섞어가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다. 그런 관계는 새로 만들기보다 지켜내는 쪽이 훨씬 어렵다는 걸, 이 나이가 되니 더 잘 안다.

 

제주로 이주한다는 건 집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들과의 거리를 스스로 늘리는 일처럼 느껴졌다. 고요를 얻는 대신, 익숙한 목소리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앞에서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제주는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묻는 듯했다. 지금의 너에게 더 필요한 게 무엇이냐고. 속도인가, 관계인가. 자연인가, 사람인가. 나는 아직 그 질문에 답을 끝내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섬에 마음을 두고, 발은 아직 친구들 곁에 두고 산다. 언젠가 마음이 더 익으면 그때 옮겨도 늦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가 들수록 선택은 줄어들겠지만, 대신 기다릴 줄 아는 법을 배운다. 그 기다림 속에서도 충분히 살고 있다면, 그것 역시 나쁘지 않은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