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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곶자왈 탐험기: 돌 틈에서 숨 쉬는 원시의 심장 -휘주니-

by 휘주니 2025. 8. 25.

 

곶자왈 사진은 아님
곶자왈 사진은 아님

 

제주는 바다와 한라산의 섬이지만, 그 너머에 숨겨진 또 하나의 심장이 있다. 바로 '곶자왈'이다. 이름부터 낯설고 신비로운 이 숲은, 흔히 생각하는 그저 그런 푸른 숲과는 차원이 다르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곶자왈'이라는 이름 속에는, 곶(숲)과 자왈(자갈이나 암석이 뒤섞인 곳)이 합쳐진, 그야말로 제주의 독특한 자연환경을 고스란히 품은 원시림의 정체성이 오롯이 담겨 있다. 곶자왈은 마치 살아있는 미스터리 박스와 같아서, 그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시간의 경계를 허물고 태초의 지구로 돌아가는 듯한 아득한 신비감에 휩싸이게 된다.

 

돌 틈에서 피어나는 생명의 신비: 제주의 허파이자 보물창고


곶자왈은 일반적인 숲과는 형성 과정부터가 다르다. 빌레(넓은 바위지대) 위에 엉기성기 얽힌 용암 덩어리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 돌무더기 사이사이에 생긴 틈새로 빗물이 스며들어 지하수를 함양하고, 그 과정에서 습도와 온도가 독특하게 유지되는 '숲 속의 허파' 역할을 한다. 덕분에 북방한계 식물인 철쭉과 남방한계 식물인 고사리 등이 한데 어우러져 자라는 기이한 생태계가 형성되었다.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이 숲은, 지하 깊숙이 스며든 물이 다시 지표로 솟아나면서 독특한 미기후를 형성하는 곳이기도 하다. 때문에 겨울에도 온화하고 여름에도 시원한, 천연 에어컨 같은 역할을 한다.

 

발을 내딛는 순간, 발아래 느껴지는 돌멩이들의 촉감이 예사롭지 않다. 매끄러운 흙길이 아닌, 울퉁불퉁한 용암석 위로 뿌리 내린 나무와 덩굴들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그야말로 '돌이 곧 숲이요, 숲이 곧 돌'인 셈이다. 이 척박해 보이는 환경에서 어떻게 저렇게 무성한 생명이 피어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드는 순간, 우리는 곶자왈이 지닌 생명의 강인함과 순환의 지혜를 마주하게 된다. 쓰러진 나무는 썩어 거름이 되고, 그 위로 새로운 생명이 뿌리를 내리며, 다시 돌과 함께 어우러져 거대한 생명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낸다. 이곳의 생명들은 땅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어 미세한 틈새의 물기를 찾아내고, 돌을 부수며 기어이 생을 이어가는 끈질김을 보여준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자연의 무한한 적응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다.

 

시간이 빚은 원시의 숨결: 태초의 지구를 걷는 듯한 경험


곶자왈을 걷는 것은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면, 거대한 고목들이 하늘을 가려 낮에도 어둑한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공룡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에, 숲을 찾은 이들 또한 아득한 태고의 시간으로 빠져드는 듯한 묘한 감흥에 젖어들게 된다.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아 원시림의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곶자왈은 그 자체로 거대한 자연 박물관이다. 마치 수천만 년 전의 지구가 이랬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손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웅장함이 압도적이다. 숲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소리와 곤충의 울음소리는 자연의 고유한 하모니를 이루며 명상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를 스치며 내는 소리는 마치 숲이 직접 들려주는 옛이야기처럼 들린다. 곶자왈이 숨 쉬는 소리는, 바위를 깨고 솟아나는 약동하는 생명의 소리이며, 수만 년을 이어온 제주의 대자연이 들려주는 묵직한 속삭임이다. 인류 문명이 미치지 않는, 거대한 원초적 에너지가 느껴지는 공간이다. 인간이 지은 어떤 건축물도, 어떤 예술 작품도 흉내 낼 수 없는 압도적인 스케일과 섬세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곳은 또한 제주의 지질학적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이기도 하다. 여러 차례의 화산 폭발로 형성된 독특한 지형은 학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이 척박한 땅에서 생명을 이어온 제주인의 끈기와 지혜를 상징한다. 곶자왈이 지닌 생태적, 지질학적 중요성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도 연결된다. 무분별한 개발과 파괴가 아닌, 보존과 공존의 지혜를 배우게 하는 자연의 스승인 셈이다.

 

곶자왈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것: 지속가능한 삶의 메시지


곶자왈은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가? 단순히 아름다운 경관을 넘어선 깊은 메시지를 던진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것, 척박해 보이는 곳에서도 생명은 기어이 길을 찾아내 꽃을 피운다는 것, 그리고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로서 겸손하게 공존해야 한다는 지혜다. 개발의 논리 앞에 수많은 곶자왈이 훼손되거나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환경 단체와 제주도민들의 노력으로 이제는 제주의 보물로 인식되며 보존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곶자왈은 단순히 '아껴야 할' 자연을 넘어,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살아있는 메시지이다.

 

탐방객들은 곶자왈의 보존을 위해 지정된 길만 걸어야 하며, 그 어떤 것도 훼손하거나 가져가서는 안 된다. 이 엄격한 규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최소한의 존중이자, 미래 세대에게 이 신비로운 원시림을 고스란히 물려주기 위한 약속이기도 하다. 마치 거대한 자연의 도서관에서 책을 읽는 독자가 지켜야 할 예절처럼 말이다. 곶자왈이 건네는 이 메시지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과도한 경쟁과 성과주의에 지쳐버린 현대인에게, 곶자왈은 물질적인 풍요가 아닌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진정한 안식과 충만함을 찾을 수 있음을 역설한다.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에게, 곶자왈은 오랜 세월 묵묵히 제자리를 지켜온 바위와 나무들처럼 흔들림 없는 중심을 가지는 법을 가르쳐준다.

 

곶자왈, 숨 쉬는 제주의 심장. 그곳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다. 제주라는 섬이 걸어온 시간과, 앞으로 걸어갈 미래를 묵묵히 보여주는 거대한 비망록이다. 이 원시의 숲에서 우리는 자연의 섭리, 생명의 강인함, 그리고 공존의 지혜를 배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도 아직 발견하지 못한, '곶자왈' 같은 미지의 생명력이 숨 쉬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될 것이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우리는 겸허하게 나를 되돌아보고,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얻게 된다. 곶자왈은 제주의 숨결을 넘어, 인류에게 희망을 속삭이는 살아있는 심장이다. 탐방로를 따라 걷는 발걸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숲이 선사하는 치유의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끼며, 잠시나마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순수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곶자왈이다.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원시의 공간에서 우리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영감을 얻게 될 것이다. 곶자왈이 간직한 지혜는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묵묵히 속삭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