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류장에 혼자 남은 우리 9번 선수, 버스에 타기 전에 가방끈이라도 잡았어야 했는데 놓쳤어. 별수 없이 버스까지 따라 탔지, 아무 말도 못 걸고 눈치만 살피는데도 가슴은 콩닥콩닥 얼굴은 울긋불긋, 버스 안에서 몸이 가까워질수록 난 떨고 있었어.
너무 센 상대를 찍은 거야. 코트에서 뛸 땐 작고 예뻤지만, 교복 입은 그녀는 너무 큰 모델이었어. ‘포기하고 돌아갈까?’ 이런 생각을 왜 안 했겠어.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얘깃거리는 만들어야 하잖아. 파이팅! 하며 등 두드려 준 친구들이 밉기까지 했어. 다시 마음을 잡았지만 차 안에선 말을 못 붙였는데 어느새 그녀는 내렸어. 나? 나도 뭐 지남철처럼 따라 내려졌겠지.
내리자마자 비장한 각오로 말을 걸었어. 무슨 말이건 붙이지 않으면 링에 오르지도 못하고 지는 거잖아.
“저기 저-- 오늘 시합에서 진 거 위로하러 왔어요.”
“.........” 그대가 누군데요? 하는 눈총, 너희들도 알지?
“시합은 졌지만, 그대 실력은 엄청났어요, 밀크나 한잔합시다.”
“.......”
“나도 중3 땐 태릉선수촌에서 컸기에 운동을 조금 알아요.”
“.......”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이름은 알려주세요. 기다리는 친구들도 있거든요.”
“.......강연숙(가명)”
강 씨? 아이고 일순간에 김빠진 맥주가 돼버린 나. 어린 나이에도 종씨면 안 된다는 생각, 그 바보 같은 생각에 나는 금세 풀이 죽었어. 실망한 마음에도 얘깃거리는 만들어 가야 하는 고통. 에라 모르겠다, 마구 이죽거렸어.
“2학년이지....... 요?”
반말한 게 미안해서, 번개처럼 존대로 바꿨더니 답이 옴.
“3학년인데.”
“정말이에요?”
“.......”
이게 무슨 징조지? 종씨에다 학년도 높다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그만큼 나는 정신이 없었거든. 그렇지만 우린 나란히 걸었어. 남이 볼 땐 친한 사이처럼. 생각해 봐 반세기 전 얘기야, 아니 격세지감을 생각하면 반만년 전 동화로 봐줄 수도 있어.
남녀학생이 나란히 걷기도 쉽지 않은 시절이었잖아. 175cm의 기럭지 둘이 걷는 비주얼도 지금은 흔하지만 그땐 봐줄 만했어. 예쁜 여학생이 코끼리처럼 커서 내 키 두 개가 걷는 모습, 자랑스러웠지.
시내버스도 지금보단 작았고 좌석 배열도 전철 식이었던 서울버스. 그 안에 선 사람 중에 내가 제일 큰 날도 가끔 있었거든. 그런 날은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듯한 착각과 블루스도 췄지. 잠시 회상에 잠기는데 낯선 목소리가 들렸어.
“왜 안 가요? 이름 알려 줬는데.”
“나도 3학년인데......”
“교복에 B자 배지, ABC의 'B' 2학년 아니에요?”
어이쿠, 어퍼컷 한방을 맞은 기분.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하나, 번개처럼 스친 아이디어. 얄개들의 생명은 번개 같은 임기응변에 있잖아.
“B자는 베테랑의 첫 자로 3학년을 말하죠.”
휴- 살았다. 내 비상한 머릴 누가 당하랴. ㅍㅎㅎ. 근데 그 대답은 쥐약을 물고 돌아왔다.
“진짜 3학년이라면 여학생을 따라올 시간이 있남?”
‘있남? 말이 짧아졌다. 2학년이란 심증을 굳힌 건가?’
이 물음 한방에 나는 무장 해제됐지만 거기서 물러날 순 없었어. 무슨 싸움이던 걸어서 역사를 만들어 가야 하잖아.
“좋아, 내가 우리 학교 얄개 대장인데 재밌는 얘기 하나로 웃겨볼게요. 듣고도 웃음 참으면 그냥 보내드리고, 아니면 빵집 가기예요?”
우리는 모델처럼 걸었지만 나는 슬펐다. 되는 일이 없는 눔. 기껏 따라온 상대는 종씨, 학년도 높단다. 그래도 그녀를 웃겨야 한다. ' ♬줄을 타며 행복했지♪ 수영할 땐 행복했지.' 학교가 망해 예산이 뚝 끊겼다. 수영장 입장료 20원도 각자 내며 다니란다.
야 이 개자식들아, 농구부 축구부도 공을 개인 돈으로 사서 쓰냐? ....수영장 입장료가 없어서, 가난한 아버지를 괴롭히기 싫어서 운동을 그만뒀다. 나는 곡예사인가? ♪춤을 추면 신이 났지♫
https://youtube.com/watch?v=FcKFpfaXbhI&si=AysSrwejads-vZr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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