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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연폭포, 서귀포 도심 속의 비밀 정원

by 휘주니 2025. 8. 23.

천지연 폭포
천지연 폭포

도심 속에서 만나는 비밀 정원

 

제주를 여행할 때마다 사람들은 탁 트인 바다나 웅장한 오름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바다와 산만큼이나 제주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바로 ‘물’이다. 비가 잦은 섬이기에 폭포와 계곡이 많고, 그중에서도 서귀포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천지연폭포는 독보적이다. 한라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도심을 가로질러 바다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힘차게 쏟아지는 물의 장관을 만날 수 있다. 도심이라는 익숙한 공간 안에서 만나는 이 비범한 풍경은, 여행자에게 마치 문득 열린 비밀 통로처럼 다가온다.


나는 천지연폭포를 떠올리면 항상 ‘문턱 없는 비밀 정원’이라는 표현이 생각난다. 서귀포 시내와 너무 가까워서, 마치 대문만 열고 들어서면 펼쳐지는 뒷마당 같다. 그러나 막상 그 속에 들어서면 도심의 소음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오직 물소리와 새소리만 귓가를 채운다. 사람들은 이곳을 “삼매경에 빠지는 폭포”라고도 부른다는데, 천지연(天池淵), 하늘의 연못이라는 이름처럼 세속의 소란을 잠시 끊고 고요 속에 빠져드는 장소임이 분명하다.


천지연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잘 정돈된 산책로가 이어진다. 입구에서부터 울창한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작은 터널을 만들고, 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살이 바닥에 반짝이는 무늬를 남긴다. 길옆에는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담팔수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마치 수호신처럼 이 길을 지키고 있는데, 그늘 아래 서 있으면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이따금 커다란 모기를 만날 때가 있다. 관광객들은 손사래를 치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얘들도 관광객이네. 사람 피 한 방울이 기념품인가 보다." 그렇게 웃어 넘기면 작은 불편함도 추억이 된다.

 

낮과 밤, 두 얼굴의 천지연


폭포 앞에 도착하는 순간, 시야는 단번에 확 트인다. 높이 22미터 절벽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장쾌하다. 힘차게 떨어지는 물은 아래쪽 웅덩이에 부딪히며 흰 포말을 만들고, 물방울이 공중으로 흩날리며 미세한 안개를 연출한다. 햇살이 그 물안개에 닿으면 순간 무지개가 피어오르기도 한다. 여행자들은 숨을 고르며 그 광경을 바라본다.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 눈앞의 풍경이 이미 충분히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9월의 천지연은 특히 싱그럽다. 장마와 태풍을 지나 한결 맑아진 하늘 아래, 숲은 깊고 짙은 초록을 품고 있다. 낮에는 햇살이 수면 위를 반짝이며 은빛 조각을 흩뿌리고,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폭포의 리듬에 박자를 맞춘다. 계절의 전환기답게 낮과 밤의 온도가 크게 달라지는데, 이곳에서 맞이하는 바람은 더없이 시원하다. 관광지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잠시 의자를 꺼내 놓고 하루 종일 머물고 싶어지는 공간이다.


저녁이 되면 천지연은 또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해가 기울 무렵, 폭포는 은빛 커튼처럼 흐드러지게 빛난다. 어둠이 서서히 내려앉자 조명이 켜지며 숲과 폭포가 환상적인 무대로 변한다. 낮의 천지연이 생동감 있고 활기찬 무대라면, 밤의 천지연은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장면이다. 폭포수에 반사되는 빛은 은빛 비단을 펼쳐놓은 듯하고,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는 오래된 자장가처럼 귓가를 감싼다. 마치 세상 모든 번잡함을 잠시 끊고, 한 편의 꿈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준다.


관광객들은 종종 "입장료가 조금 비싼 것 같아"라고 말하지만, 막상 폭포를 보고 나면 이런다. "이 정도면 싸네." 자연의 장관 앞에서 돈의 가치는 늘 상대적이다. 영화관에서 콜라와 팝콘을 사는 값보다 싸다면, 이미 합리적인 여행 아닐까.
특히 야경 시간에 맞춰 방문하면 연인들이 많다. 폭포 앞에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무 말 없이 손만 잡은 채 풍경에 젖어드는 모습이 눈에 띈다. 천지연은 그 자체로 ‘낭만’의 공간이 된다. 서귀포 시민들 역시 저녁 산책 삼아 이곳을 찾는다는데, 일상 속에서 이런 풍경을 언제든 마주할 수 있다니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싶다.

 

여행이 내 마음을 덜어내는 순간


여행길에서 만나는 자연은 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천지연폭포 앞에 서면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지금 내 안의 소음을 얼마나 비워내고 있는가?’ 도심 속에 있으면서도 이토록 고요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시끄러운 세상 한가운데에서, 이렇게 조용하고 깊은 쉼터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 아닐까.


폭포수 앞에서 가만히 눈을 감아보면, 귓가에는 물소리가 차오르고 발밑에는 땅의 진동이 전해진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나는 한없이 작아진다. 그러나 그 작음이 주는 겸손함이 마음을 오히려 편안하게 한다. 우리가 종종 여행을 통해 바라는 건, 더 크고 특별한 무언가를 얻는 게 아니라 이렇게 마음이 비워지는 순간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폭포 앞에서 잠시 이런 상상을 했다. ‘만약 내가 매일 아침 이 폭포 앞에서 출근 전 스트레칭을 한다면, 회사에서 상사의 잔소리쯤은 그냥 빗방울처럼 흘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내 웃고 말았다. 현실의 나에게는 그런 사치가 허락되지 않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여행자의 입장에서 누리는 이 짧은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돌아오는 길, 나는 천천히 숲길을 걸었다. 폭포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는데도 발걸음은 전혀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데크를 밟는 발걸음 소리, 그리고 뒤에서 멀어져가는 폭포 소리가 뒤섞여 한 곡의 음악처럼 들린다. 여행이란 결국 무언가를 더해가는 일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는 과정이 아닐까. 천지연폭포는 내 마음의 먼지를 하나둘 털어내 주었고, 나는 조금 더 단순해진 마음으로 서귀포의 밤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문득, 내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도 이 풍경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비밀 정원’을 하나쯤 품고 살아간다. 힘들 때마다 꺼내어 앉을 수 있는 의자 같은 공간. 나에게는 천지연폭포가 그런 장소가 될 것 같았다. 혹시 누군가 “서귀포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건 천지연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비웠던 순간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