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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얄개

(5) 그대 한번 만나요, 쭌 -휘준-

by 휘준차 2025. 3. 6.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 강 선수의 편지는 안 오고, 나에겐 운명이랄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중1 HR 시간에 손 한번 잘못 든 죄로 나를 수영반에 가두었던 학교. 그때 나는 물리반, 화학반 이런 공부동아리를 택했어야 했다. 학교는 고2 때 수영부가 해체될 때까지 운동짱들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엄마가 와서 빼가기도 했지만, 나의 엄마는 하늘에 계셨으니. 

  학교 대선배인 수영연맹 회장님이 박정희 정권에 찍혀 캐나다로 야반도주하셨고, 후원자가 없어지자 수영부는 코치봉급도 못 주게 되어 흩어졌다. 운동선수에서 자유인으로 풀린 고2 얄개 시절, 그 시절엔 공부 잘하는 애들도 학원엘 다니고 있음을 알았다. 

  나 같은 돌팍은 더 절실했으니 돈 없는 아버지를 졸라 학원비를 가슴에 품고 종로 2가로 나갔다. 그때 나의 실력은 정통영어는 꿈도 꾸면 안 되었고, 핵심 영어도 벅찼으며 기초 영어를 들을 수준이었지만, 고교 교복을 입고 중학반에 갈 수는 없는 노릇. 

  럭비부와 농구부, 정구부와 육상부는 운동장이 가까웠지만 수영부는 태릉까지 다니느라 오전 수업이 잦았다. 교복 배지는 고2인데 그 안에 중 2학년이 들어있던 셈. 그래도 여학생에게 한눈팔 땐 고등학생이었다.

  그 당시 여학생을 만날 공간은 교회나 학원뿐이었으니 거기서 흘끔거리는 일은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었다. 어려운 살림에 학원을 보내주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한눈팔기는 너무나 정신 빠진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을 다짐하던 내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사건이 생겼다. 내 책가방 귀퉁이에서 여학생의 쪽지가 나온 것이다. 1972년 8월 14일이었다. 쪽지는 난생처음 보는 모습으로 접혀있었는데 정사각형에 넥타이가 들어있는 모습 같기도 했고, 종이배 같기도 했다. 아 쪽지를 이렇게도 접을 수 있구나! 번개같이 펼쳤다.
 
  ‘저기... 그대 한번 만나요 쭌. 제헌절 5시, 뉴욕제과에서 눈 빼꼼. -숙-’ 
  글씨체는 죽여주게 깔끔 떨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휴 어떤 계집앤지 큰일 날뻔했네, 날짜가 내일인데 못 봤으면 어쩌려고 요기다 넣었지?’ ‘근데 누굴까? 필시 학원 다니는 아이일 건데.’ 나는 마음이 이미 붕 떠버려서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공부고 뭐고 거울 앞에 서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울 속의 나에게 말했다. 
  “너 공부는 어쩌려고 그러니? 아이고, 어쩌고 뭐고 우선 만나보고.” 
  나는 너무 좋아서 앞집 누나에게 자랑도 했다.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난나 누누나♬” 
  [뭐야 말을 해 말을!]
  “누나 누나 누나♬ 눈누나~”
  [말을 하라니까?]
  “나에게도 큐피트를 쏜 여학생이 있다, 이거야.”
  [그으래?]
  “장난 아니야 쪽지도 이렇게 예쁘게 보냈어. 얼굴도 예쁘겠지? 자 봐봐, 내일이얌.”
  [헉, 근데 이거 날짜 지난 거잖아. 제헌절이면 한 달이나...]
  “아니 내일이 제헌절인데?”
  [내일은 광복절이고 제헌절은 지난달인데 얘는 정신이 있니 없니?]
  순간 국화빵 앙꼬가 그렇게 뜨거운 줄 모르고 삼키다 입안이 홀랑 벗겨진 채 소리를 빽 질렀다. 
  “아이고, 그걸 지금 알려주면 어떡해, 아이고 망했네.”
  [야, 제헌절 광복절을 내가 바꾼 거니? 정신 차려 이것아.]

 

그건 그래. 누나완 하등 상관없는 일이네.

어느 계집앤지 그날 얼마나 기다리다 갔을까. 다음 날 학원에서 꾹 찔러 얘기할 순 없었을까? 그럴 애 같으면 처음부터 쪽지를 택하지도 않았겠지. 아 근데 미치겠다. 누구지?

  뉴욕제과에도 찾아가 정신 나간 놈같이 돌아다녔다. 여기 어디쯤 앉아 있다가 바람맞았을 텐데. 뷰우웅신 왜 말을 못 했지? 그러느라 학원 수업도 망쳤다. 망친 학원비를 누구에게 돌려받나...

  어느 날인가 쪽지 테두리에 무늬처럼 인쇄된 문구가 눈에 띄었다. ‘운명運命은 인명재천 하늘엔 하나님 운명運命은 인명재천 하늘엔 하나님 운명運命은 인명재천 하늘엔 하나님.....’ 쪽지를 하도 많이 펴봐서 너덜너덜 보풀이 일었다. 운명(運命)은 ‘명줄을 운전한다’는 뜻이다. 내 생명을 운전하는 이는 누굴까?
 https://youtu.be/6KIp7d6Tx8A?si=In2ZbTpBzKdlJcr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