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도 꿈에서 깨는 시간
아침 6시. 도시는 아직 꿈을 꾸고 있다. 아파트 불빛은 몇 가구만 켜져 있고, 도로 위엔 택시와 청소차, 그리고 몇 대의 오토바이만 바쁘게 움직인다. 그중에서도 내 귀를 가장 먼저 깨우는 건 ‘부르릉’ 하는 작고 거친 엔진음이다. 두툼한 장갑을 끼고, 목에 수건을 둘러맨 채 나타나는 사람. 신문 배달원이다.
나는 종종 이른 아침에 산책을 나간다. 잠이 덜 깬 머리를 흔들며 나가면, 골목 끝에서 그가 등장한다. 커다란 가방에 가지런히 꽂힌 신문들이 무슨 의식을 치르듯 하나씩 빠져나와 집 앞에 놓인다. 그 동작은 마치 오랜 연습 끝에 완성된 공연 같다. 서서히 멈추는 오토바이, 신문을 꺼내 던지는 손목의 각도, 그리고 다시 시동을 걸고 출발하는 리듬.
하루를 가장 먼저 여는 직업
신문 배달원은 도시의 하루를 가장 먼저 여는 직업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도시 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의 얼굴을 모른다. 신문은 항상 문 앞에 있지만, 그 신문이 거기까지 오는 과정을 상상해 본 사람은 드물다. 나 역시 그랬다. ‘아침이면 그냥 생겨 있는 물건’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이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추운 겨울이었다. 기온이 영하 8도까지 떨어진 날, 나는 목도리를 두르고 아파트 현관 앞에서 서 있었다. 그때 그는 모자 위로 털모자를 또 덮어쓰고 나타났다. 눈썹에 얼음송이가 맺혀 있었고, 입김은 하얀 연기처럼 흩어졌다. 나를 보더니 그는 짧게 인사했다. “추운데 일찍 나오셨네요.” 그 말이 유난히 따뜻하게 들렸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건 그때부터다. 그는 15년째 신문을 배달하고 있었다. “아침 4시 반쯤 나와요. 신문사에서 신문을 받아서, 여기저기 돌리고 나면 7시 조금 안 돼 끝나요. 비 오는 날이 제일 힘들죠. 신문이 젖으면 안 되니까 하나하나 비닐 포장을 해야 하거든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눈 오는 날은요?” 하고 묻자, 그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그 몸짓에는 이미 수많은 새벽의 눈길이 스쳐간 듯한 무게가 담겨 있었다.
그는 단골집 이야기도 꺼냈다. “이 집은 항상 신문이 깨끗하게 그대로 있어요. 출근길에 챙겨 가시나 봐요. 또 어떤 집은 꼭 접힌 자국이 있어요. 문 앞에서 바로 펼쳐 읽으시는 거죠. 그 흔적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요. 내가 가져다준 글자가 그 사람 하루를 열었다는 거니까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신문’이라는 종이가 단순한 정보의 전달이 아니라 누군가의 하루를 여는 작은 문이라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스마트폰 속 뉴스는 스크롤하다가 잊히지만, 문 앞의 신문은 손으로 들어 올리고, 종이를 펼치며, 잉크 냄새를 맡는 과정이 있다. 그 물리적인 순간이 주는 감각은, 그저 ‘읽기’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아직 절반이나 남았네요. 가야 합니다.” 그는 다시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오토바이의 붉은 후미등이 멀어질수록, 그가 건네준 새벽의 온기만 내 안에 남았다.
신문 배달원은 도시에서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빨리 퇴근하는 직업이다. 그러나 그 퇴근은 세상의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이루어진다. 그래서일까, 그들은 마치 새벽의 그림자처럼 조용히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우리가 눈뜨기 전, 이미 누군가는 우리의 하루를 위해 길 위에 있었던 것이다.
신문 앞에 잠시 멈춘다
나는 그날 이후, 문 앞에 놓인 신문을 볼 때마다 잠시 멈춘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그 장면을 그린다. 새벽 6시, 차가운 바람 속을 달리는 오토바이, 손목을 휙 꺾어 신문을 던지는 모습, 그리고 문득 스치는 이웃의 인사. 그 짧은 순간 속에, 보통 사람들의 하루를 묵묵히 떠받치는 노동이 담겨 있다.
어쩌면 이런 직업들은 ‘도시에만 나타나는 별자리’와도 같다. 해가 뜨면 빛을 잃고 사라지지만, 새벽 어둠 속에서는 분명히 반짝인다. 우리는 그 빛을 잘 보지 못하지만, 그 빛이 있었기에 아침이 온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다음에 또 산책을 나가면, 나는 그 별빛 같은 엔진음을 따라가 볼 생각이다. 그 길 끝에서, 또 다른 새벽의 직업인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